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영 Nov 24. 2021

결국엔 해피엔딩일 거야!





정말 충실하게 때로 소스라치게 아프고 이상했던 몸이 아주 천천히 나아지고 있다. 다시 잠을 잘 자고, 두려움 대신 적당한 주의를 기울이며 몸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이에겐 쉽지만 내 몸에 무리가 되는 동작을 알겠고, 무리가 되는 상황과 기분 또한 알겠는 중이다. 누워 자는 것도 힘들고, 서자니 다리가 타고, 앉자니 허리가 불편했던 나날들이 있었는데! 무언가 스치면 따갑고 온 몸의 구멍 속은 다 염증이던 때도 있었는데! 과연 내가 다시 사람으로서 제기능을 할 수 있겠나 싶었는데.



오늘
아주 오랜만에
외주 출근을 했다.


굳건한 결의 하나를 하고 출발했는데, 그것은 절대 쓸데없이 긴장하지 않고, 몸과 정신을 갈아 넣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여전히 탁자 위에 쓰레기들을 모아 봉투에 넣고, 마시지 못하는 라떼를 구구절절 거절하고, 또한, 마시지 못하는 뜨아를 한 입 먹고 앉아 있기는 했지만. 일단 먼저 웃고 고개를 끄덕이는 버릇은 여전한데 이건 일종의 습관과 같아서. 회사 속 내가 일단 하고 보는 여러 패턴과도 같아서. 차마 이런 나를 말리거나 멈출 순 없었고, 그래도. 만족스러운 첫 미팅을 마쳤다.




임신했을 때 의사 권유로 -만삭이 되고 육아를 하면서도 할 수 있을 외주 일-을 그만둬야 했을 때 다른 의미로 심쿵했더랬다. 세상에 조용히 진 느낌. 눈앞에서 해가 또렷하게 지는 느낌. 드르륵 소리를 내며 눈앞에서 주차장 문이 닫히는 느낌. 난 당시 담당자에게 유산 소식까지 알려가며 '내가 일을 계속하지 못한 건 엄살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까지 했다. 뭔가, 무엇으로부터 진 느낌이었으니까.




앞으로 매주 한 번 회의를 하러 간다. 오늘은 첫 출근. 날씨는 영하 가까운 온도였는데, 패딩 대신 코트를 입었다. 잠옷만 입고 살아도 살아지던 시기가 드디어 지났다. 나 회사 다니는 옷 입고 싶었잖아! 새로 산 팔찌도 드디어 집 밖에서 차는군!




이번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일하고, 아플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보니, 일이나 사람에 대해 지나친 선입견이나 염려 따위도 생기지 않았다. 아프면 그만 둘 거니까. 나와 결도 생각도 말투도, 어쩌면 일에 대한 마음도 완전하게 다를 사람들이지만 일을 하는 동안에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 싶게 마음이 청명한 상태다. 물론 대화 속에서 잠시 공감되는 부분과 공통분모가 여전히 있어서 달아오르며 신나기도 했지만(이러면 곁을 주게 되어 보통 위험한데). 완벽하게 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어서 '즐겁게 일하자' 외에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랜 기간 책 편집을 하면서 많이 닳고 찌부러진 마음들이 있었는데 이번엔 집필을 한다. 이전 직장에서 협업했던 회사에서, 내가 편집했던 어린이 교재들을 온라인 상에서 구현 가능하게 바꾸는 작업이다. 처음엔 판권을 보고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다. '처절하다'는 단어가 딱 들어맞게 함께 고생하고 울던 사람들의 이름을 보아서. 그리고 지금 그 사람들은 이곳에 없어서. 그러나 결국 해피엔딩이지 않나. 지금 그들은 각자 원하는 일과 공부를 찾아 떠났으니까. 그거면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만든 책을 여전히 어딘가에선 사용하고 있기에, 책 만드는 사람들에게 이거 말고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동안 편집하느라 답답해서 가슴 깊이 멍울이 졌던 내가 이제 글쓰기로 돈을 번다는 것만으로도, 옛 동료가 '그 짓을 또 해?' 하는 표정으로 "언니, 괜찮겠어?" 살며시 물어도, 당분간은 만족스러울 것 같다. 죽지 못해 살며 하루하루 겨우 연명하던 내가 기지개를 켜고(실제로 기지개를 못 켰었음), 혼자 버스를 갈아타며 내가 좋아하는 동네로 출근을 하고 보니, 살길 잘했단 생각까지 들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가 기특해서 구천구백 원 딸기 한 팩도 샀다.




여전히 몸은 굳어 있지만, 오늘 하루는 온 세상이 해피엔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무줄로 팽팽히 당기는 듯한 허리를 하고 천천히 언덕길을 오르며 '다시 출근' 길을 준비했던 이 마음 유지하며, 완전하진 않지만 나아지는 지금을 온전히 즐겨야지. 살면서 느끼는 고통의 모양과 굴곡, 색감은 누구나 다르지만, 모든 고통의 시절은 삶에 필요한 환기구를 몸에 장착하는 중요한 과정인 것 같다. 세상은 같은데 나는 아픈 전후로 분명히 달라졌다. 함께 하루를 연명하는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다. 와르르 무너졌던 우리 모두는 결국 해피엔딩일 것이야!

이 일기가 한 달 뒤에도 유효하길 바라며.






















 





 



 




이전 08화 엄마, 나 왔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