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초, 친정아버지가 우리 부부를 집 앞 편의점으로 부른 날이 있다. 그리고 대뜸 "돈은 얼마 정도 모았냐"는 거다. 그때 남편은 신학교 학생 신분을 가까스로 벗고 지금 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나는 두 번째 직장을 헐레벌떡 다닐 즈음이었고, 우리에겐 모은 돈이 얼마 없었다. 집 때문에 받은 대출만 넉넉했다. "얼마 없는데." 하며 소정의 금액을 불었다. 아버지는 급 화를 냈다. "너흰 여태 돈 안 모으고 뭐했냐?" 중고 자동차 매매업을 비정기적으로 해오던 아버지는 그날 우리에게 어느 정도 금액이라도 받아 차를 넘겨주려던 거였다. 19만을 달린 중고차, 검정 SM5였다. 친정아버지는 화를 내면서도 차는 주셨고, 당시 시어머님 말씀이 기억난다. "담임 목사님보다 좋은 걸 타면 어떡하니!"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양가의 핀잔을 들으며 우리는 묵직한 검정 SM5를 탔다. 괜히 시어머님 말씀이 성가시기도 했다. ‘성도들이 진짜 우리 차를 보고 시험 들면 어떡하지?’ 그러나 금세 익숙해졌다. 우리는 SM5가 23만을 찍도록 열심히 달려주었다. 그러다 어느새 차 없이는 그 어디도 가지 않는 딱한 신세가 되었다. 코로나도 한몫했고, 내 몸이 약해진 이유도 크다.
그러다 내가 요즘 다시 태어나고 있지 않나. 자가용만 타면 몸이 좀 쑤신다고 해야 하나. 오늘 우리는 결혼 후 차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뚜벅이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종로구 일대를 주야장천 걸어 다니던 연애 때처럼. 단, 뚜벅이가 되기 전, 남편에게 꼭 당부해야 하는 게 있었다. 가방에 읽을 책 한 권만 챙기라는 것. 어디를 여행하건 우리에게는 늘 차가 있고, 남편은 이동할 때마다 가방 속에 기본 5권 이상의 책을 챙긴다. 목회자들이 보는 책들의 등 너비를 아시나. 5센티미터는 기본이다. 그러나 오늘은 불가능했다, 뚜벅이니까. 집을 나서며 "책 한 권만 챙겼지?" 물었다. 남편은 "비밀"이라고 했다.
여러모로 남편은 뭔가 뚜벅이로서 자질이 부족해 보였다. 나는 버스나 지하철을 종종 이용하는 편이지만 남편은 아니었다. 장인어른께 차를 하사 받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가용 인생이었던 거다. 목적지는 집에서 멀지 않은 지하철역이었다. 보통 집 앞 버스 번호는 외우고 있지 않나. 나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전광판을 확인하고 버스가 4분 후 올 것을 알고 서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어쩐지 계속 두리번거리더니 "오래 기다려야 하면 택시 타자"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냥 전광판에서 4분이, 3분이 되는 걸 지켜봤다. 무슨 버스를 타야 하는지도 모르는 아이 같은 남편을 데리고, 오늘은 뚜벅이 여행인 거다.
우리는 일부러 한 정거장 앞서 내려 걷기로 했다. 3월의 햇살은 코로나와 무관하게 아주 찌릿찌릿했다. 흥분 중인 내 ‘기분 좋은 기분’이 이마 위로 상승하는 기운을 느끼며 남편을 보았는데, 남편도 미어캣처럼 주변에 촉을 세우며 걷고 있었다. 콩 볶는 냄새가 나는 구수한 시장 길을 지나, 단층 건물 속 백반집들을 보고 ‘우와, 우와’ 하며 걸었다. 오감을 자극하는 시장 길을 차로 무례하게 지나지 않고 건강한 두 발로 걸을 수 있어 좋았다.
나와 남편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은 둘 다 하염없이, 충만하게 책을 읽는 시간이다. 북카페 창가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책을 보니 마음이 괜히 고와지고, 너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른 저녁을 먹으러 근처 들깨 칼국숫집에 들어가 열무 보리밥과 만두까지 접수하고, 우린 다시 뚜벅이가 되었다. 남편은 20대 때 자주 오던 동네라며, 또 다른 시장 골목을 걷고 싶다 했다. ‘오늘 시장 두 번 걷네?’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시장을 나갈 때쯤 내 손엔 딸기가 들려 있길 간절히 바라며 걸었다. 구경 중에 내 몸은 몇 번 휘청거렸는데, 절대적으로 나를 홀린 건 골목 끝에 ‘무우’ 시루떡이었다. 팥고물이 인심 좋게 버무려진 설기 안에 무라니! 원래도 단데, 떡 사이에 물기를 머금어 촉촉하고 온기가 가득한 무라니! 게다가 손바닥보다 큰데 2500원! 이건 사야 해. 윗집 아랫집 우리집, 총 3개를 샀다. 반값으로 내린, 킹왕짱 큰 딸기도 한 팩 샀다.
주머니는 가볍게 몸은 무겁게 집에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남편은 내 앞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버스 창밖을 보고 있는 남편 뒷모습이 방금 서울로 상경한 시골 청년 같았다. 몸은 창가 쪽으로 한껏 틀어 앉아, 여태 운전하느라 보지 못했던 간판과 사람과 가게들을 유심히 보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는 그동안 남편이 운전하는 동안 창밖에 보이는 계절의 변화를, 사람들의 표정을, 번화한 도시를 다 담았는데. 남편은 늘 앞만 보고 달려야 했으니 남편도 요즘 나처럼, 다시 태어난 기분이지 않을까.
나도 창밖을 보다가 마음이 잠시 쓸쓸해졌다. 조울증인 게 확실하다. 다정한 냄새가 나는 무시루떡 같은 거로 마음이 충만해지니 이 좋은 걸 가족과 나누고 싶고, 그래서 떠오른 친정 가족. 양가 부모님 칠순이 올해라는 생각에 다다랐고, 오늘 시장에서 마주친 유모차 속 아기와 버스 안 상석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던 아이가 생각났다. 양가 부모님 칠순 잔치에 손주들 재롱은 기본일 거라 생각했는데. 현재 우리 부부는 고작 뚜벅이 데이트를 하고, 친정 엄마에게 '오늘 서점에 갔고, 시장에 갔다'는 일상 사진을 보내는, 현재 가족 구성원 ‘단 둘’이기 때문이다. 잠시 소스라치게 우울했다가, 남편이 한 정거장만 더 가서 또 걷고 싶다는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그리고 이미 내 체력은 끝났으므로, 더 걷자는 말은 못 들은 척하고 내렸다.
그리고 글을 쓰며 오늘을 다듬는다.
결혼한 지 8년. 그동안 열심히 일했고, 공부했고, 잠시 임신했고, 아팠고. 열심히 앓았고. 우리도 모르게 어딘가 구멍 나고 부서진 곳을 자세히 볼 수 있었지. 다른 둘 아니고 우리 둘이니까 볼 수 있었던 거야. 보고 나니 고칠 수 있었고, 천천히 껴 맞춰 나가는 일상을 사는 중인 거지. 해 아래 그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고통을 서로에게만 뽐내고, 이제는 서로를 가장 안쓰러워하며 안아줄 수 있는 게 지금 우리 둘이지. 뚜벅이 동네 여행은 둘이니까 가능했던 거야.
그러니 단 둘이었던 이 하루가 결코 불행하지 않다는 것. 철없다거나 부끄럽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 세상에 그만 죄송해도 된다고 혼자 자꾸 말한다. 버스 안에서 찍을 수밖에 없었던, 나이 40을 넘겼으나 여전히 아이 같은 남편 사진을 다시 보며. '우리집에도 큰 애가 있어!'라고 외치기도 하고. 그리고 하늘에 내일도 잘 부탁한다고 속삭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