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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Sep 20. 2022

예쁘고 싶어




머리끝에 분화구가 있는 모양이다. 많은 일을 앞두고 잠 못 이루며 머리를 굴릴 때, 얼토당토아니한데 단호한 말을 들을 때, 출구 앞을 막고 누군가 나를 가르치려 할 때, 누군가 기품 있게 무례한 말을 할 때. 내 정수리에 뚜껑 같은 게 있어 파르르 떨리는 기분이다. 이럴 때 속으로 생각한다. 세 번만 참자. 세 번을 넘기면 뚜껑은 열릴 것이다. 그때의 나는 아무도 막지 못해!




이렇게 정수리 문을 꼭 잠그고 나면, 분화구가 터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든다. 그러나 정수리 주변 두피와 얼굴에서는 여전히 김 없는 열이 난다. 한의원에서는 내 몸은 상체로 열이 쏠린 상태라고, 두피와 얼굴에 침을 놓더라. 잠 못 이루어 찾아간 병원에서는 내 상태는 일종의 화병으로 분리된다. 어릴 적 아빠 말씀에, 친척 어른이 자식 때문에 화병이 나 끝내 돌아가셨다는 그 화병.




이 병은 몸에 각종 신호를 보낸다. 화병에 대한 약보다 어쩌면 화병 때문에 생긴 여러 자잘하고 다양한 현상이 그 특징이다. 신호가 자잘하기에 집 앞 병원에 가면 급한 불 끄는 치료약을 받는다. 문제는 호전은 그때뿐, 약을 다 먹고 나면 증세는 “짜잔~ 내가 왔지!” 하고 나타난다. 근본적인 마그마가 제거되지 않으면 치료가 좀처럼 되지 않는 것.




그중에 내가 꽤 오래 방치하고 문제 삼지 않았던 증세가 있다. 지루성 피부염이다. 이 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얼굴 T존을 중심으로 염증성 반응이 지속되고, 시작은 두피가 흔하며, 얼굴, 귓불, 귀 뒤까지도 증세를 수반한다. 처음엔 얼굴에 벌레가 밤새 기어 다니는 듯 간지럽다가 며칠 뒤면 각질이 얼굴 전체를 빳빳하게 둘러 투명 가면을 쓴 기분이 든다. 그러다 몹시 아프고, 홍조가 지속되며 피부가 전체적으로 살짝 부어오르기도 한다. 스테로이드제를 바르면 가라앉지만 독한 스테로이드제에 한번 적응한 피부는 좀처럼 다른 순한 약에는 낫질 않으니, 좀 무섭다.




임신은 해야겠고, 8년 간 바른 스테로이드제는 버려야지 싶어 한의원에 찾아갔다. 얼굴은 한동안 만신창이였다. 스테로이드제와의 이별은 정말 대대적이었는데, 회사에서 회의를 하며 의견을 어필해야 하는데 피부가 적신호니 영 신경이 쓰였다. 한번은 프로젝트 마지막 회의를 마치고 단체 사진을 찍는데, 나는 양손 브이를 하고 양 볼을 가렸다. 내가 프로젝트 담당자였는데 그때 느낀 곤혹스러움이란 아니, 수치감이란! 다시 느끼기엔 벅찰 듯하다.




그러다 내 얼굴은 나름 이 상황에 포기하고, 적응했다. 한방약으로 다스리는 것도 끝이 나고 생활 습관을 통해 ‘열 오르지 않기’를 실천해야 했다. 우선 스트레스를 받고 한껏 얼굴이 상기된 날엔 자기 전에 냉팩을 한다. 유분이 아주 조금이라도 섞인 화장품은 미련도 없이 남 준다. 특별히 코로나는 내게 절망감을 줬는데, 마스크는 가뜩이나 민감한 내 피부를 늘 칼로 베는 아픔을 줬다. 그래도 써야 하니, 마스크는 면으로, 되도록 쓰지 않아도 되는 장소에서 생활한다(집뿐이다). 왜인지 내 피부에 선크림은 독약이기에 사계절 모자나 양산은 필수다. 스크럽 제품은 일절 금지이며 세수는 중지, 약지를 이용하여 살살한다. 불멍은 2미터는 족히 넘은 곳에서나 등 돌려야 가능하고, 구워 먹는 고깃집에서 가끔 내가 자리를 비운다면? 얼굴이 달아올라서다.




임신했을 땐 토 한 번을 했더니 얼굴 군데군데 진물이 생겨났다. 마치 멍든 자국처럼 아물던 진물 자리는 윗집 이웃이 나를 보고 펑펑 눈물을 쏟기에 충분했다. 얼굴로 쏠린 열이 상상 속 정수리 분화구가 아닌 얼굴 곳곳에서 빠져나가는 중이었겠지. 유산하고는 얼굴에 남은 진물을 처리하는 게 마음 정리만큼 고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빨간 진물을 참을 수 없어 다시 양약을 시도했고, 일주일 뒤 후회했다. 다시 팽팽하게 부어오르는 피부를 보며 잠시 나약했던 지난 나를 반성했다.




솔직히 이토록 지독한 피부염을 지닌 내가 딱하다. 피부가 옥이길 바라는 건 아니다. 남들처럼 시중에 파는 로션 한 번 발라봤으면. 기초화장 한번 해봤으면! 좋겠는 거다. 그런데 이 피부로 세상에 던져진 나는, 앞으로 실족사가 아닌 이상 이 상태로 여생을 살아야 하니, 생활 습관을 독하게 지키는 수밖에 없다. 내 피부를 이해하는 건, 우울증 단계처럼 분노했다가 부정했다가 포기했다가 수용하는 과정을 오롯이 지나야 하는 일이었고, 이해도가 높아진 지금은 피부뿐 아니라 내 몸의 변수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조금은 안다.





박지선이라는 개그우먼은 나보다 더 심한 피부염을 앓았다고 한다. 피부염으로 인한 일상생활의 불편함을 종종 토로했고, 코로나 기간 우울증으로 자살을 선택했다고 한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나는 그녀의 소식을 듣고 가슴이 쿵 했다. 그녀가 피부에 대해 고민을 토로한 인터뷰에 공감해왔기 때문이다. 무대 조명 아래에 서면 피부에 염증이 생긴다는 말에 누군가는 갸웃하겠지만, 나는 이해한다. 우울증에서 피부염으로, 피부염에서 다시 우울증으로 가는 양상이 남일 같지 않다.




나는 피부가 예쁘고 싶다기보다 덜 아프고 싶다. 비싼 화장품을 쓰고 싶다기보다 뭘 발라도 괜찮은 피부이고 싶다. 피부 고운 여자답고 싶다기보다 그냥 사람으로서 피부 때문에 유난 떨지 않고 싶다. 이렇게 생각해오다 어느 날, ‘그래도 결국엔 예쁘고 싶은 거 아니야?’ 하고 자문했다. 어쩔 수 없이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자존감으로 연결되는 것 같아서. 그리고 며칠 동안 ‘예쁘다’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외모든 행동이든 아우르는 말을 우리는 외모에 주로 쓰는구나. 1번 의미로만 쓰고 있는 이 말 때문에 누군가는 강박에 시달리고 누군가는 행복을 누리는구나. ‘사람이라면 모두 예쁜 구석이 있지 않나’ 하며 고민은 끝이 났다.




 ‘예쁘다’는 말이 때로 폭력적이며 차별적일 수 있지만, 잘만 사용하면 예쁜 말 같다. 울긋불긋 열꽃 피운 나에게 누군가 예쁘다 해주면 다소 찌그러졌던 마음이 펴진다. 아픈 피부로 외출 자체가 막막한데 꾹 참고 약속 장소에 나갔을 때, “오늘 너 참 예쁘다” 해주면 그렇게 안도한다. 내가 어떻든 예쁘게 봐주려는 상대의 마음이 느껴져서. 그래서 나는 여전히 피부가 아프지 않았음 좋겠고, 예쁘고 싶다. 그리고 우리 모두 예쁘다고 말하고 싶다. 

다소 미미하게 지내는 어느 일상도 다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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