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회 9 to 6 스케줄이 서서히 익숙해져 갈 무렵 어느덧 프로그램은 중반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매사에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했고, 사사로이 나태로움의 덫에 걸릴 새도 없이 면접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갔다.
빠듯한 스케줄, 알게 모르게 드러나는 경쟁구도, 부족한 실력으로 떨어지는 자존감, 잘하고 있는 걸까 반복되는 의구심 등 마음을 어지럽히는 요소들은 무수했지만 그런 우리에겐 우직한 버팀목이 되어준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중국 상해에 위치한 상해해사대학교에서 진행되는 국외교육과정(해외 교육)이었다.
상해해사대학교로부터 날아온 합격 통지서와 비자, 그리고 비행기 티켓을 손에 넣는 순간까지도 나는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스타 크루즈에서 근무하며 수없이 방문했던 중국이지만 출국함에 있어 필요한 서류를 갖추고 비자를 신청하는 과정은 마치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도시를 가게 될 때의 설렘을 안겨다 주었다.
의외로 한산했던 상해 푸동공항을 뒤로하고 상해해사대학교에 도착한 우리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캠퍼스의 규모가 실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입구만 해도 무려 5~6개, 산과 호수를 비롯해 도서관, 체육관 등 수십 개의 건물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거실이 딸린 2~3인용 외국인 전용 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었다. 체크카드 역할을 하기도 하는 학생증으로는 학식과 과일, 간식 등을 구매할 수 있어 생활하는 데 있어 매우 편리했는데 이는 놀랍게도 전부 국비 지원이었다.
我是上海海事大学留学生!
학교 생활이 완벽하게 적응될 때 즈음 우리는 본격적으로 중국어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기초 단어를 사용한 핑퐁 토크로 어휘 실력을 높여갔고 어려운 문장은 겁먹지 않고 우선 소리가 나는 대로 입 밖으로 마구 뱉어냈다. 한동안 교실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는 상해해사대학교 유학생입니다!'를 외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자전거를 타고 넓은 캠퍼스를 누빌 때 뺨을 스치는 산들바람의 상쾌함은 개운하기 그지없었다. 교내 식당은 생각 이상으로 저렴했는데, 혹시 손도 못 댈까 걱정했던 게 부끄러울 만큼 중국 음식에 대한 선입견을 하늘로 훨훨 날려주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북적거린다는 게 단점이었지만, 갖가지 종류의 음식에다 퀄리티까지 나쁘지 않아 매일 무얼 먹을까를 고민하며 식당 곳곳을 탐방하는 재미를 누렸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준비해온 옷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오프닝 세레머니에 참석했다. 교수님, 그리고 양측 관계자 분들과 함께 경건한 시간을 보내고 뒤풀이까지 완벽했던 하루.
학교 근처에 위치한 상해 항해박물관을 방문하니 초등학생 저학년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쫑알쫑알 대답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귀여웠는데, 순간 저 친구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런 생각에 흠뻑 빠져버렸다.
이 이후로 우리는 특별한 일정을 추진하지 않고 오롯이 크루즈 선사 면접에 사활을 걸었다.
준비했던 면접이 성황리에 마무리되자 본격적으로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 상해 곳곳을 탐방하는 시간을 가졌다.
상해해사대학교에서 난징동루(南京东路)나 인민광장(人民公園)과 같은 번화가를 가려면 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처음으로 동방명주(东方明珠)와 와이탄(外灘) 밤거리를 실물로 영접했던 순간, 교통편으로 고생했던 시간들을 한순간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밤에 가면 더 예쁜 상해의 대표 관광명소인 예원(豫园). 우리는 일정상 낮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무협영화에서나 볼법한 화려한 중국풍 건물 형식과 분위기에 단단히 매료되었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 거리가 어지러웠지만 동선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어서 구석구석 꼼꼼히 둘러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동안 역사책에서나 보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에 직접 방문하게 되니 감회가 남달랐다. 일정상 아쉽게도 관람은 다음번으로 미뤄두고 우리는 신천지(新天地) 거리를 거닐기로 했다.
곧 있을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거리 곳곳이 겨울 분위기를 진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이곳의 분위기에 쉽사리 동화하지 못했다.
마치 레고 마을을 연상시키는 양산 포트(Yangsan Port)에는 쨍한 색감의 컨테이너 박스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캠퍼스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깨끗한 공기와 푸른 하늘에 걸쳐진 새하얀 구름 덕분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던 날.
중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알려진 상하이 세계금융센터(SWFC)에 방문하게 된 우리는 병뚜껑 모양을 닮은 건물이라고 웃어넘겼던 실체를 알고선 감탄 또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동방명주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어마 무시한 높이에 고소공포증이 없는 나 또한 아찔했던 순간.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그 길로 우리는 상해박물관을 방문하여 남은 오후 시간을 여유롭게 보냈다.
거리마다 진열되어 있는 아기자기한 잡동사니들이 주는 포근함이 매력적인 티엔즈팡(田子坊)은 서울 인사동과 느낌이 비슷하다고 한다. 이제껏 인사동을 방문해본 경험이 없는 나는 인사동이 이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구나 하며 간접적으로 체험을 했다. 블록 블록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고 귀여운 소품들과 앤티크 한 차(茶) 상점들이 자꾸만 걷던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볼 때마다 감격스러운 화려한 동방명주와 와이탄 야경. 같은 건물이라도 다양한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황푸강 리버 크루즈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갑판 위로 올라가 강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는 크루즈에 몸을 맡기니 차갑지 않은 바람이 살랑살랑 볼을 간지럽혔다. 크루징 시간도 적당해서 이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방문해 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중국어에 문외한 사람들끼리 여행 도중 식당에 방문할 때면 그렇게 긴장될 수가 없다. 도통 메뉴판에 나열되어 있는 중국어를 읽을 줄 몰라 주로 한자에 의존하여 추리하듯 메뉴를 해석했는데, 그럼에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는 점원을 불러 바디랭귀지를 사용해 원하는 메뉴를 요청하곤 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모르는 중국 현지인의 특성 때문인지 일상생활 중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중국어를 구사하고픈 욕구가 스멀스멀 끓어올랐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치바오(七宝) 수향마을에서는 친구와 함께 중국 전통의상을 체험했다. 만두와 탕후루 같은 길거리 음식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우연히 시도한 VR 체험으로 한바탕 깔깔거렸던 즐거웠던 날.
밤바람이 차갑거나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할 땐 가끔 이렇게 기숙사 거실에서 야식을 먹으며 영화감상을 하곤 했다.
이밖에도 대형 쇼핑몰 브라우징은 물론이거니와 박사님의 지도 아래 상해에서 손꼽히는 클럽을 방문하기도, 한인타운에서 밤을 꼴딱 지새우기도 했다. 순간순간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다 함께 입을 모아 하던 말이 있다.
'상해에서의 한 달은 몇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을 거라고.'
이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결코 누릴 수 없었던 것들,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잡을 수 없었던 기회. 감사하게도 이 세 가지를 골고루 갖추게 되어 대단히 영광스러웠다. 비행기표와 개인지출을 제외하고는 전부 국비지원으로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하게 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던 우리.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도와준 공 박사님과 유학생 지예, 그리고 매일 아침 환기시키기 위해 열었던 창문 밖으로 보이던 뿌연 하늘과 고막을 강타하는 비행기의 소음이 어쩐지 오늘따라 더욱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