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내의 패신저 투어(Passenger Tour)에 가장 최적의 조건을 갖춘 부서는, 기항지 관광에 비교적 시간이 여유로운 싱어와 댄서, 그리고 뮤지션들이 속해있는 엔터테인먼트 부서, 혹은 크루즈 스탭(children/adult), 그밖에 리테일(Retail), 카지노 부서 등으로 꼽아볼 수 있겠다.
부서마다의 장단점은 존재하지만 패신저 투어를 200배 활용할 수 있는 부서는 감히 카지노 부서라고 말하고 싶다. 왜일까?
크루즈선이 항구에 접안하기 전부터 출항하는 그 시간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프런트 데스크 부서, 정박하더라도 크루즈에 머무르고자 하는 승객들을 위해 자리를 지켜야 하는 바 부서. 물론 교대근무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들의 휴식시간은 많아봐야 3~4시간이다. 그러니 주로 밤에 근무를 하는 카지노 부서가 비교적 여유로울 수밖에.
대부분의 선상 카지노는 크루즈 선이 출항한 후 오픈을 한다. 크루즈 선박이 해당 영해에서 벗어나 'International Sea'에 닿아야만 법적으로 오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크루즈 선이 정박해 있을 당시에는 특별한 업무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물론, 개개인의 업무(ex. 트레이닝, 사이드 듀티 등)는 제외하겠다.
시애틀을 홈 포트로 두고 알래스카 시즌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타 프린세스호에 승선할 당시만 해도 알래스카 시즌은 어쩐지 지루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더라. 첫 알래스카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는데 같은 곳을 또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금세 흥미가 사그라들었다. 두 번 나가는 횟수가 한 번으로 줄고 결국엔 그 한 번마저 잠을 청하게 될 것만 같은 느낌.
마침내 마주한 알래스카는 내가 처음 눈에 담았던 그 풍경과 매우 흡사한 거리, 사람들, 분위기로 여전히 고요하고 평화로운 도시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어찌 됐던 이곳에서 3개월을 보내야 하니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빙하가 많이 녹았을 텐데 이참에 실컷 자연이나 감상하다 와야지.'
친구들이랑 몇 시간씩 땀을 뻘뻘 흘리며 하이킹하고, 거대한 빙하를 보고, 기차 타고 깊숙한 산 골짜기, 자전거도 타고, 폭포도 보고, 무덤도 가 보고, 눈 덮인 새하얀 산 위에 누워도 보고. 알래스카에서 할 수 있는 웬만한 걸 다 경험해본 터라 별다른 흥미를 못 느끼던 찰나, 문득 패신저 투어(=Passenger Tour; 기항지 투어)가 생각났다. 게스트 투어라면 반복되는 기항지에 대한 지루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2년 전 멋 모르고 지나쳤을 알래스카 시즌을 제대로 누려보자는 마음이 싹텄다. 단조로웠던 내 일상에 큰 변화가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마구 솟았다.
크루즈 선박이 항구에 정박하면 승객들은 해당 지역을 관광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때 자유여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게는 선사에서 제공하는 기항지 투어에 참여한다. 해당 국가 및 지역에 대한 식견이 충분한 사람들은 자유 여행으로도 충분하지만 크루즈 여행을 처음 하는 승객들은 비교적 그 지역에 대해 문외 하기 때문에 이런 투어를 통해 그 지역을 관광하게 된다.
패신저 투어를 주관하는 선내 Shore Excursion 부서는 각 기항지의 유명 음식을 맛보거나 그곳을 대표하는 축제를 우선으로 포트별 관광 포인트를 제공한다. 어떤 투어들은 교통편이 제공되기도, 점심 및 간식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패신저 투어를 크루즈승무원은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바로, 해당 투어의 투어 에스코트(=Tour Escort)가 되는 것이다.
프린세스 크루즈 기준으로 투어 에스코트 사인 업 폴더는 크루 오피스(=Crew Office) 근처에서 찾을 수 있다. 처음 신청할 시 몇 가지 주의사항이 담긴 안내문을 읽어본 다음 신청하고자 하는 투어가 근무 스케줄과 겹치지 않는지 확인 후 기간 내에 작성하면 된다.
단, 친구들과 함께 지원이 가능한 크루 투어(=Crew Tour)와는 달리 패신저 투어는 지원 당사자만 참여할 수 있다. 가격대가 있는 투어들은 추가로 일정 금액을 지불해야 하지만 웬만한 투어들은 전부 무료로 제공된다. 프린세스 크루즈의 어떤 선박에서는 승객들을 케어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부수적인 업무를 준다고 하던데, 이곳 스타 프린세스호는 크루즈 승무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처리할 때를 제외하곤 그저 다른 승객들처럼 투어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투어 당일, 갱웨이(=Gangway; 크루즈의 출입구)를 벗어나면 판넬을 들고 있는 투어 가이드들이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본인이 가진 투어 티켓에서 나의 투어 넘버와 일치하는 곳으로 찾아가면 된다. 투어 티켓 지참은 필수! 그저 승객들 중 한 명처럼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면 되니 공짜로 하는 여행, 진정 워라밸의 실현이었다.
알래스카 시즌 동안 나는 알래스카 기항지의 대표 도시인 주노(Juneau), 케치칸(Ketchikan), 스캐그웨이(Skagway)의 대부분의 투어를 섭렵했다. 밤에는 열심히 근무하고, 아침과 낮에는 잠을 줄여가며 세상을 보는 눈과 귀를 여는 시간을 가졌다. 카지노 부서의 혜택을 톡톡히 누린 셈이다.
투어에 함께했던 승객분들은 내가 크루 멤버라는 것을 개의치 않고 반겨주셨다. 특히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나를 손녀딸처럼 여겨주셨는데, 그래서인지 이따금 진솔한 인생 조언을 해 주시기도 했다. 이처럼 투어에 동행한 승객들 덕분에 나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의 인생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 그런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희귀한 경험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알래스카 빙하를 원 없이 보았고 망원경으로 망망대해에서 고래를, 깊숙한 산골짜기에서 야생 곰을 관찰했다. 집 라인 및 암벽등반, 개썰매와 같은 액티비티 한 체험은 물론, 카누를 타고 자연 속에서 메아리를 외치거나 금을 캐고, 연어를 시식하거나 모닥불에서 소시지를 구워 먹는 등 알래스카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딱히 무언갈 하지 않아도 크루즈 선박 내부와 상반되는 청정한 자연 바람을 맞으며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쉴 때면 그걸로도 충분했다. 어떨 때는 쪽잠을 자다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비몽사몽 한 상태로 투어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잠을 워낙 좋아하던 내가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스스로에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줄곧 서비스를 제공하는 크루즈 승무원에서 투어 에스코트가 되어 승객의 기분을 한껏 누려보니 기분이 참 묘하더라. 그러면서 나의 오만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더는 볼 것도, 기대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알래스카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일까.
하와이로 향하는 길고 긴 Sea day(=전해일상) 동안 투어 에스코트를 하며 앨범에 남겨진 수많은 사진을 보다 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