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여행이 처음이시거나 웬만한 크루즈 여행을 다 해본 연로하신 분들이 자주 찾는 알래스카 크루즈는 어느 선사를 막론하고 대략 1주일의 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캐나다의 밴쿠버 혹은 빅토리아 포트에서 알래스카 크루즈가 시작되는데 기항하는 포트는 선사마다, 그리고 선박마다 차이가 있으며 아래와 같이 알래스카 주요 도시를 기항하고 다시 밴쿠버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Vancouver/Victoria/Seattle→Inside Passage→Juneau→Skagway→Glacier Bay→Ketchikan→Inside Passage→Vancouver/Victoria/Seattle
알래스카 크루즈는 주로 관광명소가 가장 많은 알래스카의 수도 주노(Juneau), 가장 느리고, 고요하고, 조용한 도시인 스캐그웨이(Skagway),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깔로 물들여진 거주지와 식당들이 가득한 케치칸(Ketchikan) 포트를 기항한다. 그밖에 앵커리지, 싯카 등이 있다.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넘어갈 때 Inside Passage*를 지나는데, 특정 시간에 오픈 덱(=open deck; 갑판)에서 빙하를 볼 수 있는 Glacier Bay*에 잠시 멈춰 서기도 한다.
*Inside Passage: 북미 피오르드 랜드의 태평양 북서부 해안에 있는 섬을 가로지르는 통로 네트워크를 따라 배와 보트를 위한 해안 경로. 이 경로는 미국의 알래스카 남동부에서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서부를 거쳐 미국의 워싱턴 주 북서부까지 이어진다.
*Glacier Bay: 글레이셔만 국립공원·보호구는 알래스카주 남동부의 글레이셔만에 위치한 국립공원이자 보호구역이다. 1980년 12월 2일에 제정되었으며, 1992년에는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알래스카의 경이로운 자연을 누리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나 사실 알래스카 크루즈는 크루즈 승무원이 기피하는 일정 중 하나이다. 그 이유는 이 일정을 최소 3개월 최대 5개월 이상 반복하기 때문. 나 역시도 카니발 그룹과 첫 컨트랙 때 홀랜드 아메리카 라인 볼렌담호에서 알래스카 크루즈를 4월부터 9월까지, 마지막 컨트랙이었던 프린세스 크루즈 스타 프린세스호에서 6월부터 9월까지 했었다.
처음에는 공기, 건물 형태, 분위기, 식물, 물 색깔 등 우리나라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모든 게 신비롭고 아름답게 느껴졌지만, 이곳에서 쌓여가는 추억만큼 어쩐지 동네 집 앞 같다는 느낌에 흥미를 잃어갔다(그래서 알래스카를 온전히, 그리고 다양하게 느끼고 싶어 기항지별로 여러 투어에 참여했었다).
'알래스카에서 뭔가 특별한 추억을 쌓을 순 없을까?'
서로의 일정에 크게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도 다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몰색 하던 중, 누군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스캐그웨이에서 바베큐 파티하러 가자!
흘러가듯 이야기가 나온 것과 달리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참여의사를 밝혀 금세 약속이 성사되었다. 카지노팀 전체가 다 함께 투어를 가는 것, 기항지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는 것, 하이킹을 하는 것, 자전거를 타는 것 등은 시간이나 금액, 체력적 소모가 크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기회비용을 다 따져보니 이 바베큐 파티만큼 적합한 것은 없었던 것이다.
지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은 크루즈에서 몇 년씩 근무한 친 구들은 바베큐 파티조차 너무 많이 경험해서 특별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스캐그웨이에는 이렇게 크루즈가 정박하는 포트 근처(도보로 5분)에 바베큐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주민들은 거의 이용하지 않으며 대체로 크루 멤버들이 이용한다. 간혹 승객들이 이곳을 지나치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얘네가 재밌게 놀고 있구나~'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주는 편이다.
며칠 뒤 IPM(=In Port Maning; 당직)을 제외하고 몇 월 며칠 대략 몇 시쯤 모여서 바베큐 파티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오랜만에 근무 장소가 아닌 곳에서 여유롭게 맛있는 음식을 즐길 생각을 하니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누가 무엇을 가져오자고 정확히 결정하진 않았지만 사용하던 게 있으면 가져오거나 필요할 것 같은 게 있으면 눈치껏 각자 챙겨 오기로 했다. 미리 재료를 구매하지 못한 친구들은 바베큐 파티 당일 근처 마트에서 재료를 구매하기로 했다.
왼쪽부터 해리스, 올레, 제프리, 라리사, 키미(한국인 승무원♡), 도루, 카렌, 타린, 나, 마키 소세지, 고기, 과자, 빵, 채소, 기름, 숯불, 수저, 접시, 케첩, 각종 통조림, 술 등. 테이블 위에 각자가 가져온 것들을 하나씩 펼쳐놓고 보니 생각보다 재료가 많았다. 확실히 미국이라 아주 저렴한 가격에 고기를 구매할 수 있었다. 나와 한국인 언니는 한국 집에서 가져온 김치 통조림과 군것질거리를 챙겨갔다.
양념 갈비가 아닌 생고기이기에 우리는 비닐랩을 벗겨내고 후추와 굵은소금을 사용해 직접 간을 했다. 양념이 잘 스며들게 손으로 꾹꾹 눌러주며 고기를 준비했는데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 사이드 메뉴인 소세지는 골고루 익을 수 있도록 칼집을 내주고 양파와 파프리카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주었다. 준비가 다 된 큼지막한 고기 덩어리 옆으로 소세지와 양파, 파프리카까지 나란히 올리고 나니 그릴 위가 상당히 푸짐해 보였다.
불의 화력이 생각보다 쎌 것 같아 어떻게 구울지 우려했던 것과 달리 바베큐 경험이 많은 친구들이 두 팔을 걷고 나서주었다. 숯에 불을 붙이고 고기가 잘 익을 수 있도록 수시로 확인하며 맛있게 구워 주웠고, 우리는 다 익은 고기는 가위를 사용해 한입용으로 알맞게 잘라서 고기를 구워주는 친구들이 배고프지 않게 입에 넣어주었다.
알래스카산 맥주인 알래스카 엠버. 노란색, 파란색 병 등 여러 가지 맛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빨간색이 제일 내 취향이다. 또 다른 날, 일정이 맞는 친구들끼리 한번 더 바베큐 파티를 했다. 이날은 바베큐를 즐기면서 간단하게 술도 한 잔씩 기울였다.
잘 모르는 분들은 근무가 있는 날인데 직원이 이렇게 밖에 나와서 술을 마실 수 있는지에 대해 의아해할 테지만, 크루즈 선사는 의외로 근무시간 외 승무원들의 음주에 굉장히 관대하다. 물론 자유를 주는 것 만큼 컨디션을 철저하게 관리해야만 한다. 술에 취해 출근을 했다가는 경고를 먹거나 짐을 싸서 곧장 집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
우리도 저녁에 있을 근무에 무리가 가지 않게 오전 일찍, 크루즈가 정박하자마자 서둘러 밖으로 나와 자리를 잡고 파티를 시작했다. 기항지 관광 시간도 충분했으며 크루즈가 출항하고난 뒤 카지노가 오픈을 하기에, 설령 음주를 한다고 한들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모두들 큰 걱정 없이 이 순간을 즐겼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로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바람이 살결을 스쳤던 날들. 운이 좋게도 우리가 바베큐 파티를 하러 가는 날마다 스캐그웨이는 이런 온화한 날씨를 보였다.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가까운 사람들끼리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웃고 떠드니 지난밤 근무로 누적된 피로가 싹 녹아내리는 것 같았던 순간.
몇 번 기항하다 보면 특별할 거 하나 없는 지루한 도시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이곳 스캐그웨이에서 크루즈 승무원이라면 꼭 해보아야 할 필수코스인 바베큐 파티를 원 없이 즐기며 평범한 일상 속 잊지 못할 추억을 하나 더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