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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Sep 02. 2020

출근하는 데 뭐가 이렇게 많이 필요해!

크루즈 승무원의 짐 꾸리기

갓 스무 살이 되던 해, 개강을 앞두고 기숙사 생활을 위해 집을 떠날 채비를 하던 때가 어렴풋 떠오른다.


설레는 맘으로 이리저리 짐을 꾸리다 보니 어느새 상자와 케리어가 두툼하게 차올랐다. 구두, 운동화, 실내화 같은 신발만 해도 종류가 몇 가지나 되었고, 봄철 옷가지들, 화장품이나 세면도구, 노트, 필기구, 가방, 드라이기, 페브리즈, 휴지 등 챙겨야 할 소품들이 가득하다 못해 넘쳐났다.


그로부터 약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코 앞으로 다가온 승선 날짜에 마음이 몹시 분주해졌다. 최소 6개월치의 짐을 싸야 하는 것이다. 새로 구매한 파란색 러기지를 내방 한가운데 두고 멀뚱멀뚱 바라보다 이내 생각에 잠겼다. 나름대로 그동안 짐 꾸리기와 여러 번 씨름을 해왔던 나였기에 별생각 없이 코웃음을 쳤는데, 그런 내 자만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순식간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대체 뭘 챙겨가야 하지?


무엇을 얼마만큼 담을 수 있을까라는 난제에 부딪혀 한참 정신을 빼앗겼던 나는 그제야 케리어에서 시선을 떼고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방 안 전체에 어지러이 놓여 있는 잡동사니들은 지금 이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너저분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뭘까...'

본래 거주하던 집을 떠나 타지에 정착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챙길 때와는 엄연히 달랐다. 승선 오티를 하면서 학교와 에이전트에서 대략적인 도움을 받았던 게 만족스럽지 않았던 걸까? 더욱이 크루즈승무원이라는 직업군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라 주변에 이렇다 하고 편하게 자문을 구할 사람조차 없던 상황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감이 잡히지 않다기보다는 무언가 중요한 걸 빠트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렇게 '무엇이 더 필요할까?'라는 물음표가 달린 이 문장은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 승선시 챙겨야 할 것?

텀블러, 고데기, 물티슈, 옷걸이, 동전지갑, 노트/포스트잇, 우산, 바느질고리, 보풀제거기, 책, 멀티탭, 이불/베개 커버, USB, 슬리퍼, 컵라면 등은 선택사항이나(기항지에서 구입 가능) 아래 나열된 것들은 필수로 챙겼으면 하는 바람.


 문서 보관용 파일 <반드시 '핸드 케리' 할 것>

: 계약서, 메디컬, 비자, 선원수첩 등 보관용

: 승선 후 샐러리를 받기까지 일정 기간 동안은 무급이므로 간소하게 챙길 것

비상약

: 선내에 메디컬 센터가 있으나 복용하고 있는 약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챙길 것

드라이기

: 드라이기는 승무원 캐빈에 따로 비치되어 있지 않음

위생용품/세면도구 등 기본 생필품

: 세제/섬유유연제 등은 기항지에 나가서 구입할 것

수분크림/인공눈물

: 건조한 선내 특성상 예민한 피부와 건조한 눈을 갖고 계신 분들에게 필요하므로 챙길 것

 비타민/영양제

: 휴일 없는 스케줄의 특성상 건강관리는 필수이므로 반드시 챙길 것

손목시계

: 카지노 부서의 시계 착용은 선택이 아닌 필수

의상

: 선상 파티/팀빌딩 등으로 필요하니 캐주얼하지 않은 의상으로 적어도 한 벌은 챙길 것






지금까지 여섯 번의 계약, 그러니까 총 열두 번의 짐을 싸고 또 푸는 동안 나만의 노하우가 생겼다. 첫 승선시 꼭 필요할 거라 확신했던 것들이 사실상 불필요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와 반대로 여러 번의 승, 하선을 거치며 이것 만큼은 꼭 가져가야 해라는 것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알짜배기만 꾹꾹 눌러 담아 버클을 채우고 케리어 지퍼를 맞닿게 할 때의 뿌듯함이란.



연차가 어느 정도 쌓인 지금은 승선 하루 전 날 천천히 짐을 꾸리며 여유를 부리는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어쩌다 시간이 촉박하다 느껴질지라도 마음의 동요 따윈 일지 않는다.


그러나 요즘따라 왠지 첫 승선을 앞두고 끌어 올랐던 조바심이,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오묘한 불안감이 새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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