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직 크루즈승무원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맞장구를 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육지와는 사뭇 다른 형태를 한 바다 위의 삶 때문인 걸까. 때로는 내가 겪어보진 않았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다.
나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크루즈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면 위의 문구를 자세히 한 번 들여다보자.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고 느껴지진 않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주변에서 귀가 닳도록 들었고, 그만큼 입 밖으로 여러 차례 내뱉었던 말일 테다. 그렇지만 우리는 굳이 저 문장이 담고 있는 무게에 별다른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스쳐가는 표현이라 그랬던 걸까. 모두의 사정은 속속히 알 수 없으나 장담컨대 대다수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거 같다.
하지만 일회용스러운 발언인 줄 알았던 이 한마디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이의 선택의 기로에서 단번에 크루즈를 택하게끔 만들어냈다. 결단코 그럴 리 없다 단정 지었으나 끝내 크루즈로 발걸음을 돌리게 된 그들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저 단어 하나하나를 잘근잘근 곱씹다 보면 나도 그들을 공감할 수 있을까.
승선이래 버고호가 처음으로 대만 킬룽항에 정박한 날
일터와 거주의 경계가 애매모호한 크루즈에서는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근무 패턴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휴일 없이 스물네 시간, 그렇게 일주일, 아니 몇 달을 연달아 근무해야만 한다.
가혹하다고? 물론 상황에 따라 이따금 데이 오프(day off; 쉬는 날)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기대는 금물. 선사별 그리고 부서별로 매우 상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어진 스케줄을 소화하며 본인의 컨트랙(contract; 계약)을 빼곡히 채워야만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선사 측으로부터 제공받는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크루즈승무원은 계약직인 걸까? 정답은 'No' 그렇지 않다는 것.
단지 직업 특성상 계약이 반복되는 형태일 뿐 엄연히 정규직이다. 따라서 회사로부터 해고를 당하지 않거나 본인이 그만두지 않는 이상은 정해진 정년 없이 근무가 가능하다.
오피스로부터 사인 오프(sign off; 컨트랙이 끝나는 날짜) 날짜를 확정받게 되면 그때부터 너나 할 거 없이 디데이를 세기 시작한다. 카운트를 하기엔 이를지 언정 무얼 하며 휴가를 보낼지에 들떠 헤실거리기 일쑤이다. 진상 승객도, 고된 업무도 끄떡없다. 머지않은 시일에 집에 간다는 그 일념 하나로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내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하선 하루 전날에는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다. 근무를 병행하며 동시에 여러 가지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선 전날 밤에는 수화물 검사를 위해 시큐러티 크루 멤버를 찾아간다. 혹시 반입 금지가 될만한 것들이 있는지 스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 수화물은 다시 방으로 가져갈 수 없으며 다음날 직접 이곳에 들러 수화물을 챙긴 후 지시에 따라 곧바로 하선한다.
전날 공지한 시간에 맞춰 크루 오피스(crew office; 크루 멤버들의 편의를 봐주는 곳)에 찾아가면 선원수첩, 여권, 계약서, 메디컬 사본을 포함한 각종 서류들을 되돌려 받게 된다. 유니폼과 린넨은 직접 가서 반납해야 하며 새로 올 크루 멤버를 위하여 침구 정리 및 캐빈을 깔끔하게 정돈하는 건 필수이다.
홍콩 하버시티에 정박해있는 버고호
스타 크루즈 버고호에서의 하선은 오후 늦게 포트에서 공항으로 출발하는 스케줄이라 서둘러도 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대체로는 아침 일찍 준비를 마치고 배가 항구에 정박하자마자 하선하며, 홈 포트(home port; 母港)일 경우에는 새로운 크루 멤버가 대거 승선을 하는 시스템이다.
크루즈에서의 추억이 만족스러우면 대게 다시 돌아오곤 한다. 그 말은 즉, 첫 컨트랙이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면 그 길로 크루즈와는 영영 연을 뗀다는 걸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한 번의 컨트랙, 아니 과감하게 첫 승선 도중 그대로 선상 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분들의 소식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떠한 이유에서든 재승선을 결심하지 않았다 하여 상대방을 이러쿵저러쿵 단정 지으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와 생활양식이 전부 다르다는 것을 공교롭게도 선상 생활을 하며 깨우쳤기 때문이다.
버고호에서 하선 후 홍콩 공항에서 비행기 타러 가는 길
그렇지만 궁금증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야'라고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크루즈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대체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음 컨트랙을 시작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