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승무원이 되고 말테야"라고 다짜고짜 선전포고를 던졌던 당찬 열아홉의 나는 어느덧 스무 살이 되어 본격적으로 크루즈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꿈에 그리던 크루즈 승무원학과에 입학한 것만으로도 성공적으로 첫 단추를 꿰었다는 만족스러운 기분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그 당시 크루즈승무원이라는 같은 꿈을 가진 친구들과 어울려 특색 있는 학과 수업을 듣는 것만큼 재미난 일은 없었다. 배우는 과목의 분야가 다양한 만큼 내가 좋아하는 것, 그리고 잘할 수 있는 것을 금세 깨우쳤고, 뿐만 아니라 비교적 내가 어느 부분에 있어 취약한지 또한 쉽게 발견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지금껏 좋아하는 일이라 여겼던 것들이 생각보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에 1차 충격을, 그리고 그와 반대로 의외의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는 내 모습에 2차 충격을 받게 되었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두려움과 설렘이 한 끗 차이로 공존하고 있는 미묘함을 발견했던 순간은 온몸이 부르르 하고 떨려왔었다.
따뜻한 어느 봄날, 감사하게도 우리 재학생들에게 소중한 기회가 선뜻하고 찾아왔다. 바로 겐팅 그룹의 자회사이자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사인 스타 크루즈(Star Cruises)와의 면접 일정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다. 더욱이 이번에는 매우 이례적인 예우로 카지노 부서를 중점으로 면접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면접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기쁨도 잠시, 우리가 지원 가능한 부서는 오직 카지노 부서뿐이라는 안내에 내적 갈등은 점차 고조되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의 나는 계산 문제, 즉 수학이라는 과목을 끔찍이 싫어했었기 때문이다. 머리와 마음이 각자의 주장을 뽐내면 뽐낼수록 자신감은 소리 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그토록 원했던 크루즈에 승선할 수 있는 기회가 코 앞에 다가왔는데 점점 망설여지는 내 모습이 자꾸만 초라하게 느껴졌다.
심지어는 같이 면접을 보는 동기들 중에서는 이미 해외에 다녀온 경험이 있거나 그곳에서 영어를 배워 유창하게 구사하는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태껏 우리나라를 벗어나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 모습에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반복되는 좌절 속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법. 눈을 질끈 감은 나는 이 정도쯤은 별 거 아니라며 마음을 강하게 고쳐먹었고, 하지 못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로 전략을 바꾸었다. 나를 믿고 내가 갖고 있는 장점을 부각한다면 안될 것도 없지 하며 주문을 외웠다.
면접 준비를 하는 동안 이따금 불안감이 엄습하여 나를 집어삼키기도 했지만 되도록이면 빨리 그 어둠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했고, 부정적인 생각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나를 다독이며 페이스를 유지했다.
스타 크루즈 선사와의 면접은 부산진구에 위치한 동의대학교에서 이루어졌다. 100% 합격을 기원한다는 학과 유니폼을 그 어느 때보다도 단정하게 차려입고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용모를 살핀 후 면접 장소로 향했다. 같이 면접 준비를 했던 동기들 뿐만 아니라 부산외대와 동의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면접을 치르게 된다는 말에 왠지 모를 긴장감이 대기실 속을 맴돌았다. 어색한 그 분위기 속에서 교수님 그리고 동기들과 함께 수다를 떨다 보니 긴장되어 떨리던 가슴도 조금 진정되는 듯했는데, 때마침 어디선가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면접관의 인상은 생각보다 좋았다. 푸근한 동네 아주머니의 느낌을 풍기던 그녀는 긴장했을 우리를 위해 최대한 편하게 진행하겠다는 여유로운 몸짓을 내비쳤다. 아이스 브레이킹으로는 사소한 질문들을 시작으로 대화를 이끌어내셨는데 자연스러운 화법 덕분에 나 또한 부담감을 내려놓고 면접에 임할 수 있었다.
대기시간에 비해 면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면접관은 영어가 모국어인 원어민들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느냐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우리가 외국인들과의 대화에서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는지를 기대하는 듯했다. 지원자 경험 위주의 스토리텔링을 선호했고 지원자가 선상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를 중시하고 눈여겨보는 것 같았다. 갖가지 색의 카지노 칩을 다루어야 하는 포지션인 만큼 색맹 검사 또한 필수로 이루어졌다.
특별한 스펙이 없는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시절 한동대학교 영어캠프에 참여했을 때 외국인과 영어라는 언어로 소통하면서 영문모를 흥미를 느꼈던 경험과, 대학생 시절 필리핀 교환학생 친구들과 교류한 이야기로 면접관과 핑퐁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행히도 면접관은 내 경험들을 흥미롭다는 듯 경청해주었고 크루즈 승무원이 되고 싶어 하는 내 열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진행 내내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잘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적중했던 걸까, 운이 좋게도 나는 몇몇 지원자들을 포함해 당일 합격 통보를 받게 되었다. 면접이 끝나고 바라본 하늘은 구름이 많이 낀 흐린 저녁 날씨에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고 있었지만 마음은 따사로운 봄날에 활짝 핀 벚꽃의 모양새를 하며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를 나섰다.
학교에서 보낸 1년 하고도 절반이라는 시간은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기에는 확실히 충분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배움이 고프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게 부족하지도 않았다고 느꼈던 건, 아마 일생을 다 바쳐 좋아할 일을 비로소 찾게 되어서이지 않을까? 두 번째 단추가 문제없이 꿰어질 수 있도록 나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다시 한번 숨을 고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