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인이 되면서 점점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가 권선징악의 교훈은 어쩌면 다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릴 때 가난에 찌들어 힘들게 고생하면서도 늘 한결같이 착하고 정직하게 살던 주인공은 결국엔 부자가 되거나 복을 받거나 왕자님과 결혼하거나 등등등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이 아름다운 교훈은 현실에선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걸 서른 넘어서야 깨달았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나쁘게 살던 사람들은 언젠가 벌을 받을 거야라고 믿었던 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어른들이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같은 동화를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어렴풋이 기억하는 건 어쩌면 현실에선 반드시 보장할 수 없는 권선징악의 결말이 동화나 소설에선 너무나 뚜렷하고 구현되기 때문에서가 아닐까. 대리만족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권선징악 주제 자체가 '판타지'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직하고 착하게 살아왔다. 집안 자체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기도하고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는 늘 겸손하고 착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배워왔었고 실제 부모님께서도 그 본보기를 보여주셨다. 어쩌면 세상을 너무 몰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쓴 맛'이라는 것이 이제는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맛본 것 같다. 학생 때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됐었다. 크게 말썽 부리지 않고 그저 정해진 시간에 맞춰 규칙을 지치며 공부만 열심히 하면 나쁘지 않은 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나의 노력으로 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노력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열심히 했음 열심히 한대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받는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물론 매번 '운'이라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그래서 학생 때는 권선징악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학생 때 권선징악이란 결과적으로 성적이었으니 공부 열심히 하고 똑똑한 친구가 좋은 대학을 가는 건 당연했다.
스무 살 이후로 느꼈던 권선징악의 교훈은 당연히 연애가 아니었을까. 여러 번 연애를 하며 다양한 사람들도 만나보고 그중에는 (내 기준) 나쁜 놈들도 있었는데 바람둥이 전 남친이 꽤나 잘 나가는 걸 봤을 때 아마 그때 처음으로 권선징악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십 대 여리고 여릴 때라 당시에는 꽤나 충격이었고 그래서 그 바람둥이 전 남친이 천벌 받거나 하는 일이 다 안되길 내심 바랬던 것 같다. 물론 내 바람대로 그에게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방 여자애랑 더 잘 먹고 잘 살았던 듯. 물론 지금은 소식도 끊겼도 어찌 사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연애와 이별의 쓴 맛은 나에게 꽤나 큰 상처였다. 결국 착한 사람이 벌을 받네.
그래도 연애와 이별에서 느낀 권선징악의 거짓말은 새로운 연애가 시작될 즈음 자연스럽게 잊히기 마련이다. 어차피 연애란 그런 거지 하며 오히려 나 자신에게 더 집중했다고 해야 할까. 자존심과 자존감이 약간 상처 입긴 했지만 회복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회복탄력성의 법칙이 맞는지 반복된 연애와 잦은 이별에도 예전에 한 달이 지나야 회복했던 일상을 하루 만에도 회복 가능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뭐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겠지만.. 그래도 상대방의 행복을 기원할 만큼 성숙해진 것 같긴 하다.
근데 사회인이 된 후 직장에서 맛보는 권선징악의 거짓말은 차원이 다른 것 같다. 이건 내 자존감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될 뿐더러 생계(=돈) 와도 관련이 있다 보니 생각이 많아지는데 내 가치관이 맞는지 흔들리게 된다.
회사에서 성공하려면 겸손함은 필요 없고 내가 잘났다고 끊임없이 자기 어필을 해야 하는 것인가.
열심히 묵묵히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맡은 일을 했을 때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성실하고 정직함 보다는 꼼수와 이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얍쌉함이 오히려 더 이득일지도 모른다는 것.
회사 일도 결국엔 사람이 하는지라 '설득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그 설득력이란 게 단순히 논리와 호소력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 이면엔 다양한 요소들이 있겠지만...)
인턴까지 포함하면 직장생활 10년 차에 접어들다 보니 이전엔 몰랐던 것들도 점점 보이기 시작하고 게다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어린 나이에 해외파견 생활을 하며 이런저런 조직의 다이나믹스를 경험하다 보니 생각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애증의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더 잘 해내고 싶지만 나 스스로 내 역량 상 잘할 수 있을지 자주 의문이 드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