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운수좋은날, #담백함 #순백색 #설렁탕 #뽀얀국물
'설렁탕'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학창시절 문학시간에 읽었던 '운수좋은날' 이라는 단편소설이 생각이 납니다. 인력거꾼 김첨지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설렁탕을 먹고 싶어하는 것을 기억하고 설렁탕을 사서 돌아오지만, 온기하나 없이 싸늘한 아내의 주검만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서 비극적인 감정이 절정에 이르며 소설이 끝납니다.
설렁탕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소설 '운수좋은날'의 배경처럼 일제강점기 시대에 서울 종로와 청계천에 수많은 설렁탕집과 설렁탕을 배달하는 배달부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비교적 근대에 만들어진 음식의 형태가 아닐까 합니다.
일본의 생선초밥(니기리즈시)이 빠르게 음식을 먹고 일을 해야 했던 근대노동자의 패스트푸드 역할을 했다면, 한국의 설렁탕은 든든하고 건강한 패스트푸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맡고 있습니다. 주문과 거의 동시에 깍두기와 김치가 나오고, 몇 분만 기다리면 따끈한 쌀밥과 펄펄 끓는 뽀얀국물의 설렁탕 뚝배기가 한상 차려지는 경이적인 속도는 경이롭습니다.
저는 어릴 때 곰탕과 설렁탕을 거의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경상도 지역에서는 뼈를 고운 뽀얀 국물을 곰탕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 사골과 뼈를 고운 설렁탕과 차이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소면을 같이 주느냐 안주느냐, 국물이 맑은가 뽀얀가를 떠나 설렁탕이라는 존재는 뭔가 자극적이지는 않으면서도 슴슴한 매력의 국물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설렁탕을 좋아할까요? 스키니진 대신 헐렁한 바지와 어릴 때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던 브랜드(FILA 등)를 좋아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20대와, 예전만큼 세상이 자극적이지 않은 40대 과장님들과 친하게 지내기엔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는, 저는 이도저도 아닌 나이입니다.
설렁탕집에 가면 식사를 하는 연령대가 높습니다. 이 세계에서는 비교적 저도 젊은 축에 속하는 편이라, 내심 ‘여기서는 내가 막내야’라는 생각과 함께 약간의 안도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맵고, 짜고, 시고, 아린 단맛이 주는 극단적인 자극도 젊음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영원할 줄 알았건만, 이젠 마냥 맛과 호기심이 주는 쾌락을 덮어놓고 받아들이기엔 ‘건강’이라고 하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할 것이 생겼습니다.
설렁탕의 슴슴한 매력은 아마도 ‘인생이란 생각보다 소소할 수 있겠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매력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릴 적에 꿈꾸던 환상과 희망이 생각보다 손에 쉽게 닿지 않을 때, 자잘한 재미와 쾌락을 쫒으며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며 보냈던 신선놀음을 마냥 할 수 없을 때, 그렇게 인생이라는 무대의 크기가 작아지더군요.
하지만 설렁탕이 마냥 재미없는 음식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슴슴한 국물속에 베인 알 수 없는 무게감과 담백한 맛을 내는 고기와 내장들, 매일 담는 신선하고 시뻘건 김치와 깍두기가 맛의 변화구를 줍니다. 송송송 썰린 대파의 초록향도 좋습니다. 하얀 순백색의 국물에 깍두기 국물을 넣어 오묘한 빨간 맛을 즐기는 방법도 있습니다. 흰색과 빨간색의 만남은 제법 진지합니다.
밥을 먹다 주위를 둘러봅니다. 여기는 혼자서 밥을 먹어도, 소주를 마셔도 아무렇지도 않은 진정한 혼밥이 가능한 곳입니다. 담소를 나누며 밥을 먹는 중년 부부, 생각보다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사람, 소주 한잔을 곁들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 등 각자의 삶을 살다 설렁탕을 먹으러 잠시 모인 이곳에서 저는 상념에 잠깁니다.
뽀얀 국물과 밥알에 잠시 비치는 저를 바라보며, 빨간색 깍두기 국물을 붓습니다. 제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뚝배기를 들어 국물을 마십니다. 따뜻하고 처음과는 다른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갑니다.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빈 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라는 사장님의 소리에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밖으로 나섭니다.
따뜻한 국물을 먹어서 그런지 이마에 약간의 땀이 맺힙니다. 겉옷은 팔에 걸고 다시 길거리로 나섭니다. 든든하게 먹어서인지 왠지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심심하고, 슴슴한 국으로만 여긴 설렁탕 국물이, 든든한 고기뼛국물이 되어 온몸에 퍼집니다. 이제 집에 가서 쉬고, 내일 출근을 해야겠죠? 그래도 포만감이 절 위로해줍니다. 그렇게 위로를 받으며 집으로 갑니다. 아! 설렁탕을 먹고 나서 입가심 사탕을 먹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전 이상하게 설렁탕 국물의 여운이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