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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애 Jul 27. 2024

처음의 식탁

내가 박살 낸 것들 1

 남편이 유럽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그때만 해도 해외여행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던 때라 아이들과 나는 기대로 들떠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며 무거운 캐리어를 받아 들어왔다.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온 사람이 더 반갑지만 뭘 사 왔는지에 더 마음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꽉꽉 눌려 억지로 닫은 캐리어가 흥부의 박이 터지듯 열리는 순간, 이국적인 포장의 미지의 물건들과 낯선 향기가 나고 쏟아지는 금은보화처럼 물건들이 하나씩 꺼내질 때마다 환호와 감탄을 쏟아냈다.


그중에서도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깨질 수도 있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싸고 또 싸서 무사히 데려온 부부 와인 잔 세트가 나왔을 때 나는 탄성을 지르며 특이하고 아름다운 잔의 모양에 홀딱 넘어갔다.

    

선물 개봉을 끝내고 기쁨을 가득 안은 상태로 포장지며 쏟아낸 물건들을 정리하고 얼른 밥을 먹기 위해 서둘렀다. “이건 저쪽에, 저건 이쪽에  그리고 와인 잔은 너무 예쁘니까 장에 넣지 말고 조금 더 감상하고 넣자" 텔레비전 옆에 잔을 올려놓았다. 먼지 청소대로 바닥을 밀며 바삐 마무리하고 급하게 몸을 돌려 주방으로 가려는 순간 “ 쨍그랑” 소리가 났다.  


으악! 와인잔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있었다. 두 눈을 의심했다. 모두 일시 정지 상태가 되었다. 걸레 대의 뒤 끝이 와인 잔을 친 것이다. 앞만 보고 바빴던 나는, 안타깝게도 뒤에도 눈이 없었던 나는 미처, 전혀, 꿈에도 내 등 뒤의 일을 알지 못했다. 걸레대가 아슬아슬하게 춤을 추고 있었을 그 찰나를.

  

나의 부지런함을 참사로 마무리 지어버린 걸래대의 정직함. 무참하게 깨져 산산이 흩어진 유리 조각들. 직전까지의 기쁨과 흥분과 행복도 함께 박살이 나는 순간 이동을 했다.

   

아직도 얼이 빠져서 미안해할 정신도 못 차린 내게  ”아, 엄마!! “  아이들의 원망이 날아왔다. 차마 남편은 화를 내지 못하고 ”괜찮아 하나는 멀쩡하잖아? 이건 집에 와서 깨져라는 운명이었나 봐. 잔 하나로 둘이서 나눠 마시면 더 다정하지 않을까”  평정심을 찾으려고  미소도 보였다

    ‘

그래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다고, 유리인데 깨질 수도 있지 뭐’ 나의 눈, 코, 입이 흔들렸지만  그 위로에 용기를 내어  "엄마 손은 정말 마이너스의 손인가 봐 " 강한 척 말했다. 하지만 내 실수의 상처는 꽤 오랫동안  남아서 뻔뻔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잔의 유해를 모두 버릴 수가 없었다. 남은 부분을 수습하여 깨진 잔에 사과 모형을  담아 나름 무슨 초현실파 작품 같다고 하면서 장식장 뒤 켠, 손안 가는 곳에 아쉬운 대로 뒀었다. 그렇게 잊고 지내다 미련이 없어질 즘 날카로운 깨진 부분이 위험하기도 해서 버리기로 맘먹었다.

   

그래도 바로 쓰레기통으로 던지지는 못하고 마지막으로 별 기대 없이 가늘고 긴 손잡이 부분을 잡고 힘줘서 훕 꺾었는데 아래 받침 부분과 손잡이 부분이 너무 깔끔하게 칼로 자른 듯 톡 떨어졌다.

 

깨진 잔을 쉽게 못 버린 건 이 잔 받침이 특이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인데 딱 그 부분만 이렇게 쉽게 떨어진 것이다. 신기 방기- 버리지 말라는 운명이지. 눈이 번쩍 띠였다.


잔의 흔적이 미미 하게 있지만 전혀 다른 유리 조각품으로 다시 살아났다. 유리로 만든 향꽂이 옆에 두었더니 잘 어울렸다. 오히려 이런 변신이 뿌듯한 재미로 느껴지게 되었다.

 

그러나 남은 하나의 온전한 잔은 이상하게 손이 안 간다. 착하고 조용하게 자기 할 일 잘하는 아이보다 말썽 부리고 문제 일으키는 아이 이름 더 많이 부르게 되듯 깨진 잔은 자주 눈길도 손길도 깄는데 가만히 있던 착한 잔은 짝이 깨져버렸다는 이유로 외면당하며 그날 이후 홀로, 멈춰버린 시간 속에 서 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체코의 어느 유리 공방에서부터 나란히 여기까지 온 둘도 없는 단짝. 젊은 그들은 향기로운 와인을 담고 레드카펫 위의 여배우처럼 우아하게 서있는 꿈을 꾸었을 거다. 늦었지만 오래된 그 꿈을 이루어 주어야겠다. 드보르작의 신세계를 낮게 켜 놓은 저녁. 잔 가득 와인을 따르고, 조명을 반사하는 잔 받침.

20년 만에 함께 하는 처음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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