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박살 낸 것들 2
내가 박살 낸 것들
긴 생머리를 하고 있던 시절에 내 눈을 사로잡은 핀이 있었다. 흰색이라는 것과 단순하면서도 화려한 게 맘에 쏙 들었다. 내 형편으로서는 아주 비쌌지만 (지금도 비싸다) 별로 망설이지 않고 샀다. 뒤쪽 가장자리를 힘주어 누르면 깍지를 낀 손처럼 서로 맞물려 있던 빗살 같은 게 양쪽으로 열리고 머리카락을 꽉 물어서 단단하게 잡아준다. 핀을 하고 나가면 모두 한 마디씩 했다. 파리지옥 같기도 은빛 달님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핀은 나를 빛내주는 장신구로 흡족한 기쁨을 주었다.
너무 좋으면 나쁜 일이 따라오는 걸까. 출근하려 핀으로 머리를 올려 집는데 틱 소리와 함께 전기가 나가듯 헐거덩 -입이 열려버렸다. 앵? 내 정신도 잠깐 나갔다 돌아왔다. 스프링이 빠진 거다. 아무리 이리 저리 해 봐도 안 돼서 결국 포기했다. 예쁘다고 머리 위에 얹어서는 다닐 수 없으니까. 아까워서 버리지는 못하고(나의 특기) 간직하고 있었다. 스프링이 빠진 파리지옥은 더 이상 파리를 잡을 수 없어지고 내 액세서리 상자 한 칸에 거의 20년을 박재된 채 있다.
-에필로그 -
2024년 핀은 올해 부활했다. 이 글을 본 남편이 인터넷을 오래 뒤져 수리하는 곳을 찾아냈고 그게 제주도였고 사진을 찍어 보내고, 수리 가능하다는 답을 받고, 핀을 정성껏 포장해서 보내고, 다시 생명을 얻어 내게 돌아왔다. 핀은 푸른 바다 건너 제주도를 구경을 하고 와서인지 더 예뻐졌다. 빠진 스프링이 제자리를 찾아 힘 있게 입을 벌려, 멀쩡 할 때만 좋아하고 고장 나니 버려둔 나의 무정함을 꽉 집었다.
긴 머리카락을 자연스레 올려 집어 잔 머리카락이 나풀 대던 그때도, 흰 머리카락을 염색으로 가린 지금의 파마머리에도 핀은 여전히 반짝이는 달님처럼 아름답다. 다시 살아난 기쁨을 온몸으로 뽐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