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문 터진 물건 4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수건을 본다.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이 훨씬 많겠지만 나는 그냥 수건을 본다.
책을 읽을 때도 있었다.
지금 책 꽂는 자리에 빗이 놓여있다.
그냥 앉아서 맞은 편의 수건걸이에 걸린 수건을 본다.
글씨가 없는 수건들은 무늬나 짜임이나 풀어진 실오라기를 본다.
외국 브랜드이름이 영문으로 새겨지거나 찍혀있으면 그걸 유심히 보고 읽어 본다.
내 생리적 현상과는 별개로 멍 때리는 거다.
수건멍 -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잠이 덜 깬 상태로 눈을 반쯤 감고 변기에 앉아 수건에 쓰인 영문을 읽으며 -
촌스럽기는- 저걸 왜 쓸까? 하는 찰나
"촌스럽기는 이게 왜 촌스러워요 - "
으악! 수건이 말을 한다.
"그게 들어가야 기념품, 답례품 맛이 나죠"
진짜가 아니잖아. 남의 로고를 쓰니까 그렇지.
" 모두가 아는 영어 이름이 들어가야 좀 간지가 나죠
이건 오랜 전통과 같은 거예요. 빠지면 어쩐지 좀 맹숭하죠."
그래 키치 한? 없으면 어색해지나? - 레트로한 멋? 있어보이기 위한?
"걱정 마요. 요즘은 수건에 자신들 만의 로고로 엄청 개성 있게 만들어요. 우리 같은 수건들은 점점 없어질 거예요"
그러고 보니 저런 짝퉁 로고가 좀 정겹기도 하다. 엄마 아버지 생각도 나고.
그 후로 수건은 기다렸다는 듯 내가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만 앉으면 말을 한다
" 신월 6동 한마음 큰 잔치 기념이에요."
저런 것도 했군. 한마음은 뭔 한마음이야 - 누가 갔던가?
"지금은 다 낡아서 글씨도 잘 안 보지만 저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경로당 행사하고 데려왔어요."
이제 그만 쓰고 버리려고 했던 수건이다.
그래 저 때만 해도 어머니는 경로당에 나가서 밥도 하고 총무도 맡고 정정하셨지.
"회사 창립 기념일에 만들어졌는데 언제나 멋진 로고로 뽐냈죠."
지금은 망한 회사의 창립기념일 수건이야. 안타까운 일이야. 엄청 잘 나가던 회사였는데 -
진짜 해마다 품질좋은 멋진 수건을 주었지.
"시현이 돐 기념 수건이에요"
10년 전이라니. 벌써 3학년 어린이가 되었네.
"지호 돌 잔치 기념 수건이에요"
아 맞아 쥐띠라서 수건에 쥐를 새겨서 귀엽다 했지. -
" 시골 초등학교 동창회 체육대회 기념수건이에요"
내가 가지도 않고 찬조 금만 보냈는데 친구가 수건을 보내줬지.
저 때만 해도 지금보다는 젊었어. 다들 이제 늙어서 운동회는 할 수 있을까?
"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기념 수건이에요. 아이들이 귀엽게 들어가 있어요"
그 다음 3년을 코로나 때문에 운동회도 체험학습도 아무것도 못했지. 아이들이 없는 우울한 학교였어.
"전교조 모임 기념수건이에요"
전교조 하는 일도 없이 회비만 많이 내서 짜증 냈는데 -ㅋㅋㅋ
"아파트 분양 모델하우스에서 줬잖아요"
그때 아파트를 샀어야 했는데 - 복도 지지리도 없지.
"교장 선생님 정년퇴임식 때 왔어요."
퇴직하신 교장 선생님은 지금 어떻게 뭘 하고 계실까? 좋으신 분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나는 영원히 퇴임 같은 건 없을 듯했는데 나도 곧 퇴임이구나.
"하양 성당에서 만든 수건 하양연화 - 에요"
하양에서 자란 우리는 지금 다 흩어져 살지.
그 시절이 우리들의 화양연화였어. 예쁘네
수건이 말을 한다.
"이러려고 제가 만들어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