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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애 Aug 06. 2024

내 눈에 비커

내가 박살 낸 것들  10

마흔 살 즈음에는  녹차가 유행이었다. 카페가 거리를 장악하고 가정에도 직장에도 커피 머신을 두고 원두가 어떠니 커피 맛이 어떠니, 아아 한잔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이 멋을 지나 일상이 되어 버린 지금과 달리 그때에는 다도를 배우고 차에 대해 알고 차를 즐기는 것은 대중적인 우아한 취미였었다.

 

차가 얼마나 몸에 좋은지 녹차를 넣어 만든 음식과 간식이 소개되고 가장 오래된 차나무를 찾아가고 차의 유래와 스님들이 기르는 차밭이 소개되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많았다. 백화점에도 고급 차를 파는 코너가 있었고 통도 다양하고 예쁘고 특히 중국을 다녀오면 반드시 차를 선물했다. 

인사동에도 차를 팔거나 찻잔을 파는 가게가 많았다. 각종 차들의 향연이었다.  우리도 차 시음회도 가고  여러 차 종류와 다기를 갖추고 차를 즐겼고 도자기를 좋아해서 예쁜 찻잔도 사 모았다.

    

차 도구도 다양해져서 평소에는 편하고 쉽게 차를 쉽게 우릴 수 있는 포트를 쓰기도 했다. 차를 넣고 더운물을 긴 유리그릇에 붓고 뚜껑에 달린 귀여운 공 같은 손잡이를 꾹 누른다. 물이 미는 느낌의 손 맛이 있다. 그릇에 꽉 끼는 망을 쭉 끝까지 내리면 된다. 망 아래쪽에는 찻잎이 남고 위에는 찻 물이 맑게 우려 져 고이게 되는 것이다.  유리그릇은 과학실 비커랑 너무 똑같아서 약품 냄새가 날 것 같았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한 번에 많이 차를 우릴 수 있어 여러 사람과 차를 마실 때 편하고 설거지가 간편했다.

  

그 설거지가 문제가 되었다. 세제 묻은 손에서 미끌, 손 쓸 사이도 없이 유리그릇이 떨어지면서 다른 그릇과 부딪혀 금이 갔다. 미끄러지는 중에 망했다를 직감하며 과학실 비커를 떠올리고 있었다. 내 눈대중으로는 500ml 비커와 정말 똑같다. 걱정할 거 없다.


비커를 뚜껑과 맞추기 직전까지도 나는 희망에 차 있었다. 하지만 뚜껑은 비커 속으로 그냥 쑥 빠졌다. 꽉  낀 내 기대도 같이 빠져버렸다. 그래 그럼 그렇지 돈 버는 회사가 등신이 아니면 비커랑 크기를 같게 만들 리가 없지. 다른 차 주전자를 쓰면서 다시 유리그릇만 구입이 되나? 했지만 깨진 그릇을 다시 사는 일은 잊혀 갔고 뼈다귀처럼 남은 뚜껑과 망은 거치적거려서 버려 버렸다. 그렇게 생각에서도 지워졌다.  


지난해에  ‘엄마 예전에 이거 우리 집에 있었잖아 ’ 하고 둘째가 사 온 차 포트를 내놨다. 새삼 반가우면서도 깜짝 놀랐다.


20년 지난 지금 봐도 진짜 500ml 비커랑 너무 똑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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