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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가 Oct 24. 2021

암 소식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

그날 이후 죄인이 되었다

 한참 동안 휴대폰을 손에서 들고 만지작거렸다. 머리로는 침착하자 하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들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휴대폰 너머 들리는 신호음보다도 쿵쾅쿵쾅 울리는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울려 퍼지는 심장소리가 들릴까 귀에 휴대폰을 바짝 붙여본다. 후~!


"여보세요~"

"엄마~"

"어~ 저녁은 먹었어?"

"네, 먹었어요. 엄마도 저녁 드셨어요? 아빠는 퇴근하셨어요? 뭐하세요?"

"먹었지, 다 치우고 그냥 앉아서 TV 보고 있지 뭐."

"아.. 저기.. 엄마..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아빠 안 바쁘시면 좀 바꿔주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어렵게 꺼낸 이야기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미안해요.. 잘 살아보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네요.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한 톤이 낮아진 목소리로 아빠는 말했다.

"그래. 알아볼게. 쉬어라."

더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싶었을 테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할아버지, 여기 손가락이 이상해요~"

할아버지의 손을 펴고 손가락을 하나, 둘, 셋, 세리던 5살 손녀딸이 말한다.

 "그래~ 여기가 좀 이상하지? 자, 이제 오른손 손가락도 세려 볼까?"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오른손 손가락을 펼쳐 손녀딸에게 내밀었다.


누가 내 딸 아니랄까 봐. 나도 그맘때 똑같이 물은 적이 있었다.

" 아빠~ 여기 아빠 손가락은 왜 다른 손가락보다 다르게 생겼어요? 짧고 손톱도 없고.. 이상해요!" 

" 아빠가  오래전에 일하다가 다쳤었어.

날카로운 기계에 손가락이 잘렸었는데, 그날 이후로 검지 손가락이 뭉툭해졌지"

아버지는 별일 아닌 듯 덤덤하게 말하셨었다.

덤덤함 속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은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볼 수 있었다. 삼십 평생을 함께 살면서 아버지의 검지 손가락은 그저 다섯 손가락의 일부였을 뿐.  반쯤 절단된 뭉툭한 검지 손가락은 그의 쓰라린 청춘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 인생에 가장 아픈 손가락이지 않았을까.


 넉넉지 않은 시골집에서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일찍 타지 생활을 시작한 아버지.

학업을 포기하고 직장 생활하며 번 돈은 집안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에 보탰다. 맏이라는 책임의 무게를 안고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립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슬하에 딸 하나, 아들 하나. 진짜 '가장'이 되었다.


내가 열 살 때인가.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엄마, 나, 동생을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가셨다. 그곳은 허허벌판이었고 주변에 큰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산과 논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곳이 우리가 나중에 살게 될 곳이라고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한 번씩 그곳에 가서 공사가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보셨다. 완공이 되기까지 아파트가 층층이 높아져가는 과정들을 멀리서 지켜보셨다. 왜 그리도 자주 그곳을 찾아가셨을까? 그때는 어려서 몰랐다.

10년이 지나 우연히 서랍 속에 있던 아버지의 통장을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인 그곳을 완공되기까지 출근하듯 자주 드나들었던 이유는 아버지 생애 처음 대출을 받아 내 집 마련을 한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토끼 같은 자식들과 주인집 눈치를 보지 않고 다달이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내 집'이 지어지고 있는 허허벌판을 보며 아버지도 새로운 인생 설계도를 그리고 계셨을 것이다.  층층이 높아지는 아파트 건물만큼 아버지의 희망이 담긴 미래도 완공되고 있었으리라.

세월이 흘러 빛바랜 아파트의 외곽은 몇 번의 도색작업을 거쳤다.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 속에 부모님은 변함없이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곳에 머물고 있.


 고등학생 시절, 실직한 아버지가 한동안 집에 계셨을 때 컴퓨터 앞에 앉아 일자리를 알아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주말을 보내고 일요일 저녁 기숙사로 가기 위해 짐을 꾸리던 내게 아버지는 나를 불렀다.

"요즘 용돈 달라고 얘기를 안 하네~ 아빠가 일을 안 해도 그 정도는 줄 수 있어~" 

멋쩍게 웃으시면서 3만 원을 지갑에서 꺼내 주었다. 어려운 시기가 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남다른 철학이 있었다. 절대 남의 돈을 빌려 살지 않겠다는 것이었는데 내 집 마련 이후 아버지 삶에서 대출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분수에 맞게 사는 것. 넘치지 않게 절제하며 살아가는 것이 불변의 원칙이었다. 

가계부채로 인해 허덕이며 살고 있다는 딸의 말을 전해 들은 그날 밤. 밤은 길고도 길었다.




 아무개는 말한다. 부모라면 당연히 자식을 위해 도움을 줄 수도 있는 거 아니냐. 그렇게까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고. 괜찮다며 위로를 한다. 미안하지만 그 말들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글쎄. 자라온 환경과 사고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부모가 되고 보니 그렇더라. 무탈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내가 잘나서 큰 게 아니었다. 부모의 희생과 사랑이었다.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참아가며 오직 자식을 위한 삶. 덕분에 아버지의 절제된 삶에서 자랐음에도 부족함을 느끼거나 부모를 원망하며 지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는 인색했지만 자식 앞에서는 풍족하게 채워주기 위해 보이지 않는 희생을 하며 사셨던 분들이셨다. 


 솔직히 왕성하게 다 큰 자식이 독립을 했으면 제 갈길 알아서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부모라는 이름으로 언제까지 '당연함'을 부여할 것인가. 부모의 능력 여부를 떠나 언제까지 자식의 '짐'을 떠안아야 하는 것인가. 언제까지 '희생'을 강요받아야 하는 것인가. 부모가 되고 보니 나를 닮은 내 자식은 사랑스럽지만 그에 따른 '희생'마저 사랑스럽지는 않더라.  

'초등학교만 입학하면 나아지겠지!' '엄마를 찾지 않는 순간이 오겠지!' 그때 독립선언을 외치리라.

불량엄마라고 손가락질해도 할 수 없다. 나는 하고 싶은 꿈도 이루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렇기에 내가 그날 부모에게 전한 그 말들이 얼마나 죄질이 나쁜 것인지 안다. 그들에게 '자유'를 뺏고 또다시 '희생'과 '짐'을 준 것이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지만, 어느 부모가 아픈 손가락을 모른 척 지나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암 판정을 받은 날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 그날 이후 죄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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