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왜 그랬는지 신혼 초에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결혼생활 5년이 지나고 아이가 생기고부터는 서서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더라. 엄마의 품이 그립고, 엄마가 해준 밥이 그리울 때가 많아진다.
임신 초기에 입덧으로 물 한 모금 삼키기 힘들 정도로 비실비실 했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속이 울렁거려 오랫동안 차를 타지 못해 엄마 밥이 먹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3개월이 지나 조금 나아졌을 때 친정으로 가서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나서야 나의 입덧은 끝이 날 수 있었다.
5월 행사가 많은 달.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을 맞이 할 겸 오랜만에 친정집에서 일주일 머물다 오게 되었다.
일을 하시는 부모님은 퇴근 후 돌아오면 적막했던 집안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핑크빛 기류로 전환되었고, 사랑스러운 손녀의 재롱은 피로회복제가 되었다.
어린이날.
"윤아~ 할아버지가 장난감 뭐 사줄까?"
천진난만한 아이는 할아버지에게 대답한다.
"할아버지~ 빨간색 소방차 사주세요~!"
"그래, 그래~ 또?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할아버지~ 수박 먹고 싶어요! 수박이랑 복숭아랑 포도랑...."
평소에는 본인의 옷도 잘 사 입지 않으시고 쇼핑을 잘하지 않는 절약이 몸에 밴 아버지!
이날만큼은 손녀의 손을 잡고 손녀가 좋아하는 장난감과 먹을거리,
손녀가 좋아하는 캐릭터의 옷과 일상복 몇 벌을 망설임 없이 구매하셨다.
그렇게 아버지의 지갑에서 손녀의 어린이날 선물이 빠져나갔다.
힘들게 버신 돈으로 한 번에 많은 지출을 하게 된 것에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정작 부모님은 좋아서 깔깔깔 웃어대는 손녀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셨다.
며칠이 지나고 어버이날.
퇴근하고 돌아온 부모님께 외식하러 나가자고 했더니 손사래를 치시며 이런 날은 손님 대접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북적북적 사람들이 많아 싫으시다며 집에서 간단히 있는 반찬으로 먹자고 하셨다.
배달음식도 싫다는 부모님.
그렇게 큰 이벤트 없이 어느 일상처럼 소소하게 저녁을 함께 먹고 용돈 10만 원을 드리며 필요한 것에 보태 쓰시라고 드렸다. 특별한 선물도 맛있는 음식도 없고 형식적인 것 같은 용돈만 딸랑 드리고 나니 마음이 무거웠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쉬고 있는데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 말을 건네었다.
"우리 마트 갈까? "
"왜요? 뭐 필요한 것 있어요?"
"엄마가 봄 옷 한 벌 사 줄 테니 가자~ 요즘 예쁜 옷들 세일도 많이 하던데 가서 구경이라도 해봐~"
"아니에요. 괜찮아요~ 피곤하실 텐데 집에서 쉬어요~"
"아빠가 너 맨날 이 국방색 재킷만 입고 다닌다고 옷 좀 사주라고 하시더라. 살림살이한다고 네 옷 안 사 입고 살림에만 신경 쓰고 아낀다고 옷도 안 사 입는 것 같다고 걱정하시더라. 엄마가 옷 사 줄 테니 가서 골라봐."
"집에 옷 많아요~^^ 이 옷이 편해서 이것만 자주 입게 돼서 그런 건데... 괜찮아요^^"
사실 집에서 육아만 하다 보니 거의 나갈 일이 없어 외출복을 안 사 입은 지 몇 년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친정집으로 갈 때면 편안한 차림으로 갈 때가 많았는데 옷에 크게 관심 없으시던 부모님이 딸의 옷에 신경이 쓰였다는 건 내가 정말 같은 옷을 몇 해 동안 자주 입었었나 보다.
이건 다른데 쓰지 말고 꼭 네 옷 사 입어
내가 몇 번이고 괜찮다고 하니 엄마는 마지못해 내게 20만 원을 쥐어주었다.
우물쭈물하다가 어쩔 수 없이 받게 된 돈을 지갑 속으로 넣으며 나도 모르게 울컥 감정이 오르려는 것을 애써 태연하게 참아내었다.
부모님의 입장에선 내 딸이 예쁜 모습이길 바랄 것이다. 나도 내 딸이 커서 매일 같은 옷만 입고 다닌다면 걱정도 되고 마음이 아플 것 같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서 못 이기는 척 마트에 따라가서 옷 한 벌 얻어 입어야 했을까? 그러고 보니 엄마와 단 둘이서 쇼핑한 적도 언제 적이었는지... 지나고 보니 내 옷이 아니더라도 엄마 옷이라도 구경하러 갔다 올걸 그랬나 후회되기도 했다.
딸의 입장에선 이미 부모님께 크게 빚진 마음이 있기에 부모님 지갑에서 돈을 쓰게 하는 게 싫었다. 내가 먼저 선뜻 그렇게 해드리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과 잘 살고 있지 못하는 못난 딸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도 싫었다. 자신 없는 내 모습이 부모님께는 비치지 않길 바랐다. 부모님을 뵐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마냥 사이좋은 모녀처럼 엄마의 팔짱을 끼고 아무렇지 않게 따라갈 수 없었다.
철이 잔뜩 든 딸은 담담하게 애써 괜찮은 듯 보여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필요한 곳에 쓰시라고 그렇게 드린 용돈은 휴게소에 들러 아이 군것질거리와 커피 한잔이라도 사 먹으라며 다시 내 손에 쥐어주셨다. 돈은 잠깐 부모님에게 스쳤다가 내 지갑 속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시 돌려받은 10만 원과 옷 사 입으라고 받은 20만 원.
그 용돈들은 내 지갑 속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그래! 이번에는 내 옷 사는데 써야지..!'
며칠이 지나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던 날.
[**카드 미납안내 2020년 5월 **일 **시기준 이용대금이 입금 확인되지 않아 안내드립니다. ]
30만 원은 지갑 속에서 나오게 되었다.
[입금 완료되었습니다.]
돈이 이리로 저리로 왔다 갔다 하며 머무는 장소가 매번 바뀌지만 그 돈은 그렇게 쓰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금방이라도 쏟아낼 것 같은 고인 눈물은 텅 빈 지갑 위로 뚝 하고 떨어졌다.
이게 뭐라고.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물론, 다음 달 생활비로 같은 금액을 맞춰 그 돈으로 옷을 사 입어도 된다.
하지만 그렇게 못할 것을 엄마는 알고 계셨던 거다.
엄마도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부모가 되면 우선순위가 '나'에서 '내 아이', '내 가족'에게 넘어간다.
내 아이가 잘 먹는 모습을 보면 내가 두 개 먹으려다가도 내 아이 입에 넣어주게 되고,
생활비를 쓰고 여유돈이 남게 되더라도 내 옷을 장만하기보다는 내 아이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검색하게 된다.
그렇기에 형태가 같고 같은 액수의 돈이라 하더라도 나에게 전달된 돈의 의미는 특별했다.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부모의 마음이 깃든 것이기에 특별한 것이었다.
자신의 먹고 입고 쓰는 것 아껴서 내 딸 예쁜 옷 입혀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내가 두 번 거절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될까 봐 엄마는 나의 손을 붙잡고 함께 옷을 사러 가자고 하신 것 아닐까?
엄마는 다 알고 계셨다. 그래서 다시 한번 내 귓가에 맴돌듯이 당부하듯 내게 말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