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중으로 남겨야 했던 날들
전화벨이 울린다. 화면을 보니 엄마였다.
평일 오전 엄마의 전화벨이 울릴 때는 백발백중 홈쇼핑 주문 때문이었다. 엄마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계시지만 여전히 아날로그 삶을 살고 있다. 배우면 서로가 편할 텐데 가르쳐 준다고 해도 어렵다며 손사래를 치신다. 엄마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내게는 귀찮은 일이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엄마의 전화벨이 지금은 받을까 말까 망설여진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났을 무렵 수화기 너머로 귀에 딱지가 들도록 엄마는 말했다.
"내년에 애를 가지면 그렇게 사주가 좋다더라. 애가 복덩이란다. 나이도 있는데 괜히 약 먹고 노력하지 마라~
계획대로 하려다가 안 들어서는 경우가 많다더라. 애는 자연스럽게 나아야 해~ 요즘 젊은 사람들도 임신이 안돼서 그렇게 고생한다더라~ "
엄마는 그렇게 강압 아닌 강압적인 심적 부담을 안겨주었고, 나는 입막음으로 사랑스러운 손녀딸을 안겨주었다. 첫애를 낳고 돌이 지나서부터 엄마의 지나친 관심과 욕심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애는 혼자 있으면 외로워. 지금은 힘들어도 키우고 나면 지들끼리 알아서 큰다. 첫 애가 활발하면 둘째는 보통 얌전하다더라. 키우기 수월할 거야. 내가 절에 갔는데.. 둘째는 아들일 거라네?"
"제발 좀 그만해요. 난 하나만으로도 힘들어요.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자지도 못하던 때에서 이제야 겨우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나보고 또 하라고요? 난 절대 못해요~ 둘이 된다고 해서 육아부담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엄마 때야 둘이 놔두면 알아서 큰 다지만 지금은 그런 현실이 아니잖아요. 가족계획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 엄마도 그만해요."
내 친구 엄마는 둘째를 가졌다니 딸을 안쓰러워했다. 비교를 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딸을 위해서라면 하나만 잘 키우면 된다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때 나는 육체적으로도 마음적으로도 지친 상태였다.
원망스러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이기 전에 같은 여자의 입장으로 나를 알아봐 주길 바랐다. 우리 엄마는 아닐 거야. 하며 그녀의 꼰대를 부정하고 싶었다. 라떼는 말야라는 엄마표 라떼 한잔을 들이켜고 나면 속이 메슥꺼웠다. 불편한 거부감이 올라왔다.
"이번에 왔을 때 보니 얼굴이 거칠한 게 토돌 토돌 해가지고는 윤기가 하나도 없더라. 그러면 주름이 금방 생겨~보습크림 좋은 거 좀 사서 발라. 너도 좀 가꾸고 살아"
"내가 아는 사람의 딸은 뭐 인터넷에 글 올리고 판매한다던데 그게 회사 다녀서 받는 월급보다 수입이 괜찮은가보더라. 너도 집에서 시간 날 때 그런 거나 해봐."
어디 나갈 일도 없고 애 돌보는데도 바쁜데 가꾸고 살 여유가 어디 있을까. 계절이 바뀜에 따라 세월의 흐름 따라 피부도 변하는 거지. 집에서 놀고 있는 내가 엄마는 한심스러운 걸까. 엄마의 말들이 왜 그렇게 야속하게 들리는 걸까. 언제부터인가 엄마와 대화를 할 때면 말을 아끼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뾰족한 화살촉이 되어 엄마에게 날아갈까 봐 조심스러워졌다. 엄마만 모르는 보이지 않는 벽돌층을 쌓고 있었다. 엄마가 미웠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엄마가 미운 것이 아니라 실은 내가 미웠다. 엄마의 전화벨이 울리면 모른 척 부재중으로 남겨 버렸다.
"아까 전화했었는데 왜 전화 못 받았어?"
"아.. 방에 두고 진동해놔서 몰랐었어요. 이제 확인했네요."
결혼식 일주일 전날 밤, 엄마가 말했다.
"남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부모, 형제라도 남편, 자식 흉보는 거 아니야. 시댁이든 친정이든. 살다 보면 내 맘 같지 않을 때가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미워도 자식 앞에서는 아빠 흉보지 마라. 엄마도 지금까지 살면서 왜 속상한 일이 없었겠어. 가슴속에 품고 사는 거지. 그렇게 사는 거야."
이야, 멋진 명언이었다. 글로 쓰면 단 세줄밖에 되지 않는 짧은 말속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풍파와 굴곡을 감추며 살고 있었는지 헤아릴 수 있었다. 옆에서 지켜본 엄마는 그랬다. 속에 울화가 치밀어 곪아 터져도 온 몸으로 버티고 사셨다. 이유 없이 소화가 되지 않거나 두통이 잦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엄마는 속내를 얘기하지 않았다. 침묵만이 엄마의 유일한 방패였다. 하지만 나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자식 때문에 자신을 가꾸는 법을 몰랐던 엄마, 뭘 좋아하는지 잘할 수 있는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던 엄마가 싫었다. 답답하고 미련해 보였다. 그렇게 산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아니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살아? 나는 절대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나 자신에게 떳떳했고 당당했었다.
엄마 말이 맞았다. 어쩔 수 없는 엄마 딸인가 보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지만, 가슴속에 품어야 할 이야기들이 결혼 연차만큼 차곡차곡 쌓여갔고 엄마를 닮아가고 있었다. 결혼 전 그 당당함은 어디 가고. 현실과 타협하며 살고 있었다. 내 가족 흉은 결국 내 얼굴에 먹칠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당장 누군가에게 털고 나면 잠깐 기분은 풀리겠지만, 말이 길어질수록 감당해야 할 후폭풍은 이불 킥을 날려야 할 순간으로 되받아 돌아온다.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가, 나의 오점을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정말 법적으로 남이 되지 않은 이상 남편, 자식 흉은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아니더라. 가슴속 항아리에 고이 삭혀야 했다. 삭히다 보면 발효가 되어 쓴맛은 날아가고 진한 감칠맛으로 남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 인생의 역경은 내가 이겨내야 했다. 마지막 구원이라는 마음으로 부모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쳤던 그날 이후, 엄마의 전화벨이 울리는 횟수가 잦아졌다.
"엄마가 영양제 하나 샀는데, 아빠한테는 생신선물로 네가 보냈다고 얘기해 놓을게. 알았지? 넌 그렇게 알고 있어~ " "이번 주 할머니 댁에 갈 건데 네가 용돈 드렸다고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돈은 안 보내도 돼."
"별일 없지? 이걸로 이달 이자 나가는 거에 보태써."
"나중에 엄마 아빠, 일할 능력이 없을 때 용돈 주면 된다. 너 부담 갖지 마~ 엄마 아빠한테 미안해하지 말고~ 마음 쓰지 말고 편하게 지내. 엄마 아빠는 신경 안으니까. 돈이야 또 벌면 되는 거고. 부지런히 갚아서 너네 형편 나아졌을 때 그때 효도하면 돼~"
차라리 홈쇼핑으로 대신 주문을 해달라는 말이 그리워진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 모습을 인정해주시지. 굳이 효심 깊은 '착한' 이미지 만들어 주지 않아도 되는데 과하게 설정해주시는 부모님. 나를 위해서인지, 부모님의 체면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다. 마음씨가 못돼먹었나. 선의의 거짓을 선의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나 보다. 그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할 뿐이다. 기념일 또는 어쩌다 찾아가는 친정집에 갈 때도 엄마는 딸의 지갑에서 돈이 나가지 못하게 막으셨다. 내가 계산이라도 할라치면 가로막으셨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손녀딸 핑계 삼아 용돈을 쥐어주셨다. 그럴 때마다 고마움은 야속하게도 하이패스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그보다 밀린 숙제처럼 미안함, 부담감과 죄책감만 뒤섞여 엉망이었다.
어느 날, 수화기 너머 엄마가 말했다.
"네가 엄마 아빠한테 다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힘들게 버티고 있을지 알아. 그래도 어쩌겠냐. 윤이 아빠고, 네가 선택한 사람인데 잘 맞춰 살아봐야지."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엄마.. 사실은..... 할 얘기가 더 있어.." 하며 말하지 못한 그간의 속내를 다 털어버리고 싶었다. 가슴속 맺힌 응어리를 더 던져버리고 싶었다. 엄마가 옆에 있었다면 부둥켜안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대나무 숲이 절실히 필요했던 그 순간, 힘겹게 이성을 붙잡았다. 친정집과 거리가 있는 곳에 살아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전화 통화라서 다행이었다.
언제쯤이면 엄마의 전화벨이 울리면 들뜬 목소리로 반갑게 맞을 수 있을까.
울리는 전화벨을 바라만 본다. 수신차단. 엄마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스팸이라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