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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 할 수 있다. I can speak.

위안부 문제와 한국의 고질적 문제를 '따스하게' 꼬집어 내어온 영화

by 이자성

Prologue.

결혼식 사회를 보고 난 후 쉬는 시간이었다. 매 번마다 이루는 혼주와 신랑신부의 악수가 끝난 채 터벅터벅 자리에 돌아 앉았다. '오늘은 몇 건이나 남았는가' 누구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만큼 집중하고 긴장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성악팀과 잠시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눴다. 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화를 본 이는 우리에게 꼭 강력추천하는 영화라며, 마지막에 눈물이 터진다는 영화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적을 제외하곤 시원하게 울어본 적도 없고, 괜히 돈 주고 우울해하며 울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꽤나 옛날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는 오랫동안 나의 우선순위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항상 아무렇지 않은 일이 기회를 만드는 법이더라.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왔고 스스로 상을 주고 싶었다. 이 때 틀었던 TV에 이 영화가 서비스 되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없이 결제와 시청에 들어갔고, 시원하게 울진 못했지만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I can speak)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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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옥분(나문희)할머니와 박민재(이제훈)주임의 첫 만남은 그들의 끈질긴 인연을 암시하게 되었다. 둘은 철저하게 대비되는 인물이다. 나옥분 할머니는 자신의 상가뿐 아니라 주변 상가들의 민원 사항을 모조리 구청에 신고하야 누적 민원 건수가 8,000건이 넘는 전형적인 '오지랖'의 인물이다. 그 반면에 박민재는 9시 정각에 온 사람도 번호표를 뽑지 않으면 민원을 받아주지 않는 철저한 '원칙 주의자'이다. '오지랖'과 '원칙주의자'라는 절대로 어울릴 수 없는 인물들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관객에게 영화 본래의 의미까지의 과정을 지루하지 않도록 웃음이라는 엔진을 탑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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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명하게 대비되는 나옥분과 박민재는 어떻게 어울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 나옥분과 박민재 둘 다 외로운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전반부에서는 알 수 없지만 나옥분은 가족없이 먼 이땅에 남동생 한 명을 둘 뿐 혼자이며, 박민재 역시 어릴 적 부모님 두 분 다 일찍 여의고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결핍이었고, 그 역할을 서로 간의 융합을 통해 충족을 시킬 수 있었다. 서로 간의 역할이 필요했다. 나옥분 할머니에게는 자식이, 박민재에게는 부모님이. 때문에 긴 연휴에 민재는 동생 영재와 함께 할머니를 찾아 같이 전을 구워먹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티격태겨하던 그들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시종일관 타인의 일에 관여하기 일수이기에 도깨비 할머니로 불려지는 그녀에게 때로는 무슨 사정이 있어서일까도 궁금해진다. 영화는 나옥분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복선을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한국적 감독이 '큐'하고 울어라하는 신파도 없이, 츤데레 악역이 알고보니 우리편이라는 전형적 클리셰없이 할머니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끌어올린다. 영화에 녹아들었던 이에게 감독이 선사하는 깊은 감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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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고조되는 갈등도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어릴 적 이민으로 한국말을 잊어버린 남동생과의 통화를 위해 영어공부를 하던 것이었지만, 남동생은 누나와의 통화를 원치 않는다. 아마 위안부로 끌려간 누나가 수치스러워서였겠지. 그 사실을 알아버린 민재는 할머니에게 알려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영어 교육을 중단하지만, 엎진데 덮친격으로 할머니가 민재에게 맡긴 상가 재건축 반대 소송 주요증거물이 파쇄되고 만다. 추석 날 함께 모여 전을 부쳐먹던 그들의 모습이 불과 얼마 전인 것 같은데, 그들의 마음 갈등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아픈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갈등을 기점으로 나옥분 할머니에게 갖는 I can speak의 의미가 본래 남동생과의 대화를 위한 '나는 영어를 말 할 수 있어요'였다면, 갈등을 겪고 할머니는 '이제는 말 할 수 있어요'라는 의미로 바뀐다. 그들의 갈등에서 느꼈던 가슴아픔에서 영화는 다시 힘을 얻고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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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점을 통해 우리가 언제나 자각하고 있어야 할 가슴 아픈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게 해준다. 항상 뉴스로만 접하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때로는 역사를 단순하게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때가 있다. 위안부에 관한 수 많은 영화들이 있었으나 언제나 위안부 소녀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가슴 아픈 역사의 그 시절 그 인물에 대한 연민은 생길지언정 오늘날까지의 감정을 이끌고 가기에는 다소 부족한 힘이 있었다면, 아이 캔 스피크는 오늘 날 생존해 계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현실과 감정선에서 이끌고 가며 충분히 이끌어가고 있다. 어쩌면 '옛날 일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관념을 '옛날 일이 아닌 오늘 날까지 진행되온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자각하기에 충분했다. 잊고 안 잊음의 관념이 아닌 항상 자각해두어야하는 일이 있음을 알게 했다.






아이 캔 스피크
이제는 말 할 수 있어요(I can speak)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Written by J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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