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만 생각했던 삶을 생각하며,
화이트 오피스, 삭막한 도시의 색채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평일 낮 시간을 보내는 나의 사무실도 그랬다. 하얀 물감을 그대로 뿌려놓은 듯. 몇 개의 파티션은 서로를 마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사무실에 앉은 개인은 한 가지 목표를 두었다. 바로 '퇴근'이었다. 부여된 근무시간 내 모든 업무를 마치고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가는 것, 그것이 모두의 소소한 바람이었다. '파티션'과 '작은 목표'는 팀을 갈라 개인으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은 누군가에게 퇴사원이라는 꿈을 선사했을지 모를 노릇이다.
적어도 나는 퇴사원을 꿈꿀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회사원이어야 했고, 그래야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기에 회사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찾아 헤맸다. 삭막함을 화사함으로, 무채색을 채색으로 바꿔야 했다. 그건 나에게 누군가가 꾸는 퇴사원이라는 꿈만큼의 가치였다.
뜨거운 햇살이 정확히 정수리에 가닿던 날, 사무실을 탈출했다. 더위에 땀을 흘렸으나, 그게 무슨 문제인가 정 없는 곳을 나온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 아, 점심시간을 이용했으니 근무지 이탈은 아니다. 정당하게 부여된 권리를 이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이 아닌지라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결국 선택한 것은 좀비처럼 어슬렁거리기. 어색한 무계획에 짧은 여행은 가장 어색하지 않던 곳을 찾게 만들었다. 사실 너무 더웠기에 시원한 곳이 필요했고, 힐링할 수 있는 곳을 원했다. 어슬렁의 발끝은 다이소로 닿았다. 최적의 장소였다. 대형마트 내부에 있는 다이소였던 터라 잔잔한 제목도 모를 클래식이 나를 반겼고, 점원들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으며, 3초 만에 땀이 마를 만큼 쾌적했다. 세상 '힐링 지옥'의 명성을 온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미로같이 얽힌 다이소 매장 안을 서성였다. 이곳 다이소는 오른쪽 입구로 들어가서 라인 따라 쭉 한 바퀴를 돌면 매장 입구 왼편에 위치한 계산대가 나온다. 진짜 미로다. 중간에 사람을 못 빠져나가게 만드는 미로. 한 바퀴를 냉큼 돌고, 이제 물건을 찬찬히 살피기 위해 한 번 더 다이소 여정을 떠나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시 매장 입구 오른편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장난감 물총, 엄청 탐이 났다. 적어도 15초는 멍하니 봤다. 5000원이라는 매력적인 가격에 그 우람한 크기 하며, 어깨에 맬 수 있는 물탱크는 내 안의 욕망을 들끓게 만들었다. 누구든 그 물총에서 발사된 물을 맞으면 패배를 시인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지 못했다. 나는 회사에서 탈출한 노예였기에. 회사에 그 우람한 친구를 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뭔지 모를 술게임 도구들, 처음 알았다. 다이소는 단단히 미쳤다. 술게임계까지 주름잡을 생각인가. 생각보다 퀄리티가 상당했다. 단돈 1000원이면 술자리에 모인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생태계 파괴의 주범은 황소개구리 같은 외래종이 아니라, 다이소가 분명해 보였다. 기존 DC마트는 R&D를 어떻게 하라고 이러냐.
챙이 1m는 되어 보이는 밀짚모자, 밀짚모자에 관한 건강한 남아들의 이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모자만 쓰면 세계 최고·최대의 보물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이. 그런데 그것이 다이소에 있었다. 5000원이면 블루오션으로 나를 인도하여 세기의 보물을 찾을 수 있게 만드는 놈이! 하지만 사지 않았다. 아직 보물을 찾으러 다닐 짬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설의 레전드 '씨몽키 키우기'가 있었다. 포장박스부터 시선을 강탈했다. 파란색 배경에 캐릭터화 된 흰색 귀여운 새우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오늘 나를 가져가서 키워야 해", 라고 말하고 있었다. 엄청 크게 키우고 싶었다. 블랙타이거만큼 키운 후 구워 먹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다. 움직이는 것을 보면 신기해했다. 하지만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덕에 집은 작은 아들 몸뚱이 키우기에도 벅찼다. 그래서 나 말고 움직이는 것은 들이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씨몽키에 3000원을 투자할 돈은 주휴수당으로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블랙타이거를 만날 기대감으로 너를 집었다. 망설임 없이, 블루오션 어딘가 묻혀있을 보물을 포기하고 너를 만났다.
사이먼 윈서 감독의 <프리 윌리>라는 영화가 있다. 윌리라는 이름의 범고래와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12살 어린 소년 사이의 우정을 그린 영화다. 사람을 따르지 않는 동물과 우정이라, 다시금 그동안의 우정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든 영화 내용이었다. 물론 영화는 보지 않았다. 직장 동료가 영화의 내용을 일러준 것일 뿐. 그런데도 한 가난한 소년과 동물과의 교감은 나와 씨몽키를 연결해주는 무엇과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름을 지었다. '윌리', 앞으로 태어날 생명체의 이름은 윌리였다. 물론 한 두 마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어차피 한 마리, 한 마리 구별도 안 될 거 그냥 다 윌리로 했다. 소금과 알이 같이 들어있는 가루를 물에 풀고, 며칠을 기다리니 배추흰나비 알 같은 놈들이 태어나서 움직였다. 생명의 탄생,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어항 같지도 않은 플라스틱 통에 생명이 움튼다. 꼬리랑 다리가 구분이 된다. 그들은 살아서 움직였다. 하얀 사무실 바다에 새로운 생명, 작은 생명이 텁텁한 곳의 온도를 바꿔놓았다. 사무실 직원들은 하나 둘, 새로운 작은 생명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나는 '사랑해 윌리, 라고 말해주세요'라고 적어둔 라벨지를 뽑아서 통에 붙였다.
키우기 약 한 달여가 지날 때쯤 반복되는 환경에 윌리에 대해 관심이 사그라질 때쯤 신록의 숲을 보았다. 활엽에 울창한 숲은 사람들에게 뙤약볕을 물리쳐주는 그늘막이었으며, 지상의 생명에게는 삶을 영위하는 은신처였다. 정답은 초록색! 여름이면 응당 녹빛이었다.
녹빛으로 사무실을 칠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녹색 물감에 푹 붓을 담그고, 벽면에 한 획을 그었다. 초여름의 색으로 사무실이 물든다. 또 한 획 긋는다. 다른 쪽 벽면에 물감이 새어 들어간다. 벌어진 틈을 통해 과거의 간극을 메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붓을 든다. 칠한다. 초록의 천장이 내 눈 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마리모 키우기' 3세트를 구매했다. 소형 마리모 1마리, 초소형 마리모 1마리가 들어가 있는 세트를 3개나 주문했다. 내 것, 옆 사람 것, 뒷사람 것까지 해서 각 만 원씩을 지출했다. 윌리들이 수명이 안 그래도 짧고, 이미 많이 죽었기도 하였으므로 이왕이면 긴 녀석을 찾다가 여름에 어울리는 마리모를 분양받았다. 100년을 산다고 했다. 식물이지만 녹조류를 빨아들이며 1년에 3cm씩 커진다고도 했다. 나도 1년에 3cm가 더 크고 싶었으므로 나의 부러움을 몰씬 받았다.
속설에는 이 녀석들은 기분이 좋으면 물 위로 떠오른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두 달이 넘도록 기분 좋은 적이 없었나 보다. 내가 세팅해준 그대로 물 밑에서 아직까지도 잘 계신다. 통 기분 좋은 일을 만들어주지 않아서일까, 이 놈들도 사무실이란 공간이 그다지 안 기쁜 것일까 꽤 고민을 했다. 이런 와중에 마리모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었다. 광합성을 한다고 했다. 광합성을 하면 떠오르는다는 것이다. 나름 햇빛 드는 곳으로 옮겼다. 여전히 안 움직인다. 100년을 산다지만 움직이지 않고서야 살았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더욱이 100년 동안 안 움직인다면 마리모로 인해 나는 100년 동안 심심해야할 운명인 것이다.
다시 시선은 윌리에게로 넘어갔다. 수많은 윌리들의 시체와 먹이로 인한 녹조 발생 현상 덕에 물은 이미 생명력을 잃을 대로 잃었다. 물론 윌리들은 그런 물을 선호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싫었다. 내가 원효대사가 되어 밤잠에 그 물을 마실라야 못 마셨으리라. 그럼에도 몇 마리는 살아남아서 한 달하고도 몇 주를 더 살고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더 키워봤자 성장은 멈췄고, 우리가 아는 새우의 모습과 너무 달랐으므로 블랙타이거는 못 될 것처럼 보였다. 이미 수 없이 많은 다리와 긴 꼬리로 인해 그들이 일반적인 새우가 아님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도 윌리는 나에게 윌리였다. 그들이 사는 물은 해골물이었지만 살아 움직이니 귀여웠다. 그렇지만, 더 큰 생명체 눈으로도 잘 보이는 친구들을 보고 싶었다. 그렇다.
-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