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 중 마음의 별이 보였어 #06

눈 내리는 계절이 지나고, 봄은 온다.

by 사단화

- 누가 봐도 약도 없고, 고칠 수 없는 중2병에 걸린, 그때 쓴 글.


눈은 오롯이 계절에 도전한다. 다가오는 따스함에, 지나간 앙상함에. 마치 봄을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을 쳐 가지와 씨앗을 괴롭히고, 가을이 낳은 잎 한 장 남지 않은 나무를 거세게 때려댄다. 누군가 그랬다. 눈이 한 도전의 결과로 마침내 황홀을 피워냈으나 그 안에 상처가 있었다고.[1] 눈은 그렇게 치열하게 다툰다. 일면, 눈은 일시적이기에 도전 자체가 무색해 보일 수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가지의 덴 상처 자국에 새로운 살을 돋게 하듯 눈은 부딪친다. 차가운 대지에 떨어지는 따뜻한 눈, 서로 다른 온도에 의해 눈은 사르르 녹아 금세 제 모습을 감춘다. 하지만 조금 더 커진 눈은 이 온도를 이겨내고, 칼바람에 승리의 미소를 보낸다. 도전자로서의 승리이다.

첫사랑은 그렇다. 차갑고, 단면적인 삶에 신선한 따뜻함과 입체를 선물한다. 그대는 나에게 함박눈이었다. 아니 누구에게나 함박눈이었으리라. 추운 겨울 생명의 빛이 사라져가는 그 날들에 따뜻함을 채워주기 위해 우리에게 왔다. 포근한 느낌과 추위를 식히는 ‘그대’는 함박눈이다.

갓 성인이 되었을 때 엄마의 말마따나 소위 말하는 애인이 생길 줄 알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그렇게 자연스럽게 찾아오리라 믿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머리와 몸이 커가는 자연스러움처럼. 그러나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 시간이 흘렀다. 연애의 작위를 깨달으면서, 여전히 혼자임을 실감하면서, 나의 삶이 얼마나 얼어있는지 몸소 느끼면서. 세상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기상청의 실수였을 수 있다. 아니면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는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였을 수 있다. 온종일 쨍쨍할 거라는 기상캐스터의 말과 달리 하늘은 몇 분 만에 잿빛으로 변했다. 작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솜털처럼 가벼운 몸을 이끌고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착지한 그들은 금방 녹아 사라졌다. 그렇게 내리고 녹기를 반복, 또 몇 분이나 흘렀을까? 눈의 몸이 커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함박눈이 되었다. 적설, TV와 각종 매체는 ‘쨍쨍’이라는 말을 바꾸어 ‘적설’이라고 표현했다. 눈이 쌓인다. 그리고 당신이 나타났다.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

‘아이스크림이라니….’라고 비웃으면서도 그 말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눈 사이에 가려진 당신은 눈보다 희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함박눈보다 더. 더욱이 찬 아이스크림도 단박에 녹여버릴 정도의 따뜻한 눈이 왔다. 그래서인지 그날의 아이스크림은 그다지도 차지 않았다.

함박눈은 내 삶에 줄곧 내렸다. 쌓이고, 쌓였다. 높은 적설량을 기록하고 그 기록은 쉴 새 없이 신기록으로 경신되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손끝에 스치는 체온에서 오는 전율, 함께 의견을 맞추어 먹는 밥, 누군가에 시선을 즐기게 되는 당당함,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믿음, 옆에서 스치듯 나는 샴푸 향기, 조그만 키 덕에 간혹 내 어깨에 쿵, 하고 부딪히는 너의 몸. 셈해보자면 무수히 많아서 셀 수 없었다. 시간은 멈추고, 눈은 하릴없이 계속 내렸다.

언젠가 당신의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다. 아마 크리스마스 즈음, 눈발이 흐드러진 날이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눴다. 결론은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단 한 번도 잘 어울리는 것에 고민해본 적이 없다. 굳이 관심을 두지도 않았을뿐더러 도대체 뭐가, 어떻게 잘 어울린다는 것인지 몰랐다. 색 조합, 음식 궁합이 잘 어울리는 건 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 대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건 도통 몰랐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의 주변에서도 인정받는 느낌에 과할 정도로 기뻤다. 밖에는 여전히 눈발이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던 눈은 기상청의 예보와 함께 끝이 났다. 이번에는 정확하게 날씨를 예측했다. 구름이 떠 있어서 햇빛을 가려 온도는 낮으나 눈은 내리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동안 연거푸 내린 함박눈 덕에 도로에 혼란이 일었다. 우리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던 눈은 오히려 추위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칼바람에 치이고, 굴러다니며 제 몸을 지키려고 몸을 더 단단하게 굳혔다. 얼어버렸다. 사람들은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서로를 탓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앞에서 그렇게 움직이니깐, 넘어지는 거 아닙니까?”

“똑바로 좀 보고 다니세요. 위험하니깐.”

“아이! 짜증 나게 눈은 어디에다 두고 다녀요.”

누구도 자신의 탓이라고,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차가운 얼음은 그 상황을 그대로 자신의 얼굴에 비추며 킬킬, 혼자 비웃었다. 나와 당신도 그 비웃음 덕에 서로를 탓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얼음으로 변한 눈은 하얀색 본연의 모양을 거듭 감추며 거울 색으로 변해갔다. 비로소 도시에 모든 눈이 죽어, 얼음이 되었을 때 그곳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한두 번 말한 것도 아닌데, 왜 그걸 못 지켜줘? 너는 계속 너만 생각하는 것 같아.”

“그렇게 연락하기가 힘들어? 핸드폰은 시계야? 자리 이동할 때만이라도 연락해달라 했잖아. 어려운 것도 아니고. 왜 상대방에 대한 책임감이 없어!”

“이해할 거라 생각했지, 그게 어떻게 큰 문제라는 거야?”

그 겨울, 몇 번 비난의 말끝에, 거울이 되어버린 눈 사이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향을 향해 서로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한 발자국 멀어질 때마다 눈도 한 발자국만큼 얼음으로 변했다. 나와 나의 함박눈은 도전을 멈췄다. 온 세상이 그저 황량한 도시 빛이었다. 입체적인 세계는 단면으로 되돌아갔다.

함박눈은 상처를 남겼다. 처음 겪는 상처라 그 패인 정도를 모를 만큼. 또 얼마나 회복을 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그래서 또 다른 눈을 기다렸다. 막연히 새롭게 올 따뜻한 눈을 기다렸다. 하지만 눈은 오지 않았다. 마치 상처가 낫기를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루에 몇 번씩 상처에 대해 숙고하고, 돌보아주었다. 애정을 쏟고 아물기를 기다렸다. 점차 상처가 낫고 있음을 느꼈을 때야 상처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깨달았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그래서 같은 상처가 나지 않을 방법을 찾아보았다. 실컷 눈물을 터뜨리고,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면서, 과거의 일을 곱씹어 되새기며, 지난 만남을 반성함으로.

점차 날이 따뜻해졌다. 온도가 올라가니 얼음은 자취를 감췄다. 쓸쓸한 도시의 거울은 다 깨지고, 녹았다. 마침내 봄이 되었다. 눈이 머문 자리, 상처가 다녀간 자리에 새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새싹은 숨기고 있던 형체를 세상에 내보이고 이내 성숙하여 마침내 꽃이 되었다. 나도 모르는 새 나의 눈물도 멎었다.

‘꽃이 하나, 웃음이 하나.’

울음은 어느새 미소로 바뀌고, 세상은 달라졌다. 차가웠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무지갯빛을 선사했다. 생생한 공기의 향기는 따뜻했다. 그리고 길을 나섰다. 나는 웅크리고, 숨어있던 자신을 떨치기 위해 걸음을 내디뎠다. 걸음은 느렸다. 빠르게 걷기에는 아직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한 걸음 내디뎠을 때 세상을 그토록 외롭게만 보았던 지난날이 펼쳐졌다.

‘세상에는 즐거운 것이 없어. 매일같이, 반복되는 쳇바퀴 같고, 새로운 게 없거든.’

또 한 걸음, 함박눈이 내렸던 그 날이 그려졌다.

‘사랑이란 건…, 무엇을 어떻게 해도 즐거운 거구나. 내가 살아있음을 느껴. 어둡던 삶의 빛과 같아.’

한 번 더 발을 내디딘다. 외롭게 혼자 틀어박히고, 우는 것이 전부였던 때가 내 옆에 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거나,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달랐을 텐데.’

마지막 한 발자국을 바닥에 찍었을 때 무채색의 도화지에 수채화를 그리듯 중앙으로부터 점점 도화지의 끝까지 세상이 봄의 색으로 변하였다. 형형색색, 나에게도 봄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서로에게 인사를 한다. 봄의 포근함을 한껏 느끼며.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날이 따뜻하네요. 봄 내음이 나요.”

청소년기, 인생은 겨울이었다. 학업 압박에 취미생활은 사치고, 사람을 만나는 건 욕심이었다. 그렇게 차디찬 겨울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법적으로만 성인이 되는 시기, 20살 때 마치 기적처럼 겨울은 끝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영화와 같은 일이 현실에서 쉽게 펼쳐지진 않는다. 겨울은 계속되었다. 너를 만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뜻했지만 함박눈, 겨울이었다.

그땐 함박눈만이 유일한 따뜻함인 줄 알았다. 돌이켜보면 겉으로만 포근했다. 그래서 상실의 상처가 컸다. 눈은 계절에 도전하면서 일시적으로 온도를 높인다. 결국 눈이 지나가면, 다시 추워질 수밖에 없다. 겨울을 견디고 새롭게 움트기 위해 또 다른 도전을 해야 한다. 새살을 돋게 할 수 있게끔 말이다. 아픔은 상처를 남기지만 새로운 살을 만든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성장이다.

새싹은 눈으로 덴 자리에 꽃으로 성장하기 위해 봄을 차분히 기다리면서 거듭 꿈틀댄다. 그렇게 견디다 보면 비로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노력의 봄은 분명히 찾아온다. 진정한 황홀의 봄이.

[1]고재종,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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