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주체를 찾아서
인생을 살아감에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건 살아가면서도 수십 번씩 바뀌거나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행복이라는 단어의 포괄적이지만 단순한 그 뜻을 좋아했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
국어사전에 표기되어 있는 행복은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지만 그 뜻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감정 때문인지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는 편이다.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항상 입버릇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어"라고 외치고 다녔다.
극복이라는 단어를 몰랐던 그때는 실패라는 순간의 좌절감에 우울감이 더해지고 우울감이 지나간 자리에는 박탈감이 따라와 행복이란 감정이 싹트지 못하도록 내 감정 안에 자리 잡았다.
'나는 왜 행복하지 않지?'로 시작된 생각은
'내가 왜 저들보다 행복할 수 없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변질되었고
그렇게 변질된 나의 기준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는 행복이 주체가 된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타인과 비교하는 삶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아서 행복감이 내 안에 남아있을 리는 만무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행복이라는 껍데기를 쓴 공허함은 풍선처럼 날로 부풀어 올라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행복하겠다는 나의 의지가 나를 놓지 않아서 일까, 행복은 불현듯 다시 나에게 찾아왔다.
피폐해진 감정을 애써 외면하고 있던, 벚꽃이 흩날리고 봄바람에 온기가 가득했던 그런 날이었다.
신호대기 중 창문 너머로 본 사람들이 반쯤 떨어진 벚꽃나무 앞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힘든데, 당신들은 왜 행복한 거야'라는 미운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다. 한쪽에 차를 세우고 어릴 때 엄마한테 혼난 아이처럼 펑펑 소리 내어 울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사랑하는 봄날의 벚꽃을 제대로 보지 못했음을.
타인과 비교해 얻는 우월감은 나의 행복을 대신할 수 없고, 나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인정했다. 알고 있음에도 인정하기 어려웠던 나의 지난날들을 인정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온전히 나의 삶에 집중하는 중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완전한 나로 채워가기 위해, 그리고 봄날의 벚꽃을 충분히 보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