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지나가면 돼요
너는 좀처럼 멈추는 법이 없었어. 누군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붙잡아도 어떤 핑계를 대면서라도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곧장 나아갔어. 멈추는 법을 모르는 너는 그 자체로 눈부셨고 매력적이었어. 누군가를 좋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로 향하는 너는 시속 200km 스포츠카를 모는 것처럼 들떠보이고 행복해보였어. 힘에 부처 굉음에 내면서 너는 멈추지 않았어. 그런 너를 보며 숨이 턱까지 올라오고 지치게 되면 내게 기대지 않을까? 언젠가 한 번쯤은 돌아봐주기를 바라면서 네 뒤에 있었어.
네가 그를 바라볼 때 나는 너를 바라봤어. 멈추는 법을 모르는 너를 바라보며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지. 혹여 기다림에 지쳐 다리가 아플까 네가 자주 지나다니던 공원 앞에 벤치 하나를 놓고, 네가 싫어하는 햇빛을 막아줄 그늘이 되려 나무도 심었어. 배가 고프면 예민해지는 너를 위해 맥반석에 오징어랑 호두과자도 굽고, 소시지와 떡을 꼬치에 끼웠어. 네가 좋아하는 걸 하나하나 떠올리며 맥반석 위에 내 마음도 함께 구워 익어갔는지도 몰라. 혹시나 그 냄새에 너의 발걸음이 잠깐 멈출까, 그저 한 번쯤 돌아봐 줄까 하는 마음에.
그리고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크고 깊은 화장실도 마련해 두었어. 실컷 울고 나면 다시 웃을 수 있도록. 너를 따라다니는 강아지인형을 세워둔 것도 우연이 아니었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유치한 인형이었지만 네가 한 번이라도 웃어주면 그걸로 충분했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너는 나를 스쳐 지나갔어. 오징어 냄새에 슬쩍 뒤를 돌아보긴 했지만 다시 그를 향해 나아갔어. 오징어도, 소시지도 어떡하냐며 나를 걱정했지만 나는 괜찮았어. 아니, 어쩌면 괜찮아지길 바랐던 건지도 몰라. 사랑은 누군가에게 기대하는 순간 깨져버리는 거잖아. 너에게 기대한 내 잘못이지, 너를 원망하지는 않았어.
너를 기다리는 것도, 너를 기다림 속에서 이것저것을 준비하던 나날도 행복했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기대했나 봐. 힘든 발걸음이 잠시 내게 머물기를, 잠시라도 멈추어 내게 쉬어가주기를. 나는 너의 종착역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아. 그래도 어쩌면 그에게 향하는 발걸음에 내가 한 번쯤은 디딤돌이 되기를 바랐는지도 몰라. 그저 네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지도.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이었는지도몰라.
나를 스쳐간 지금, 너를 원망하지는 않아. 너의 행복을 빌어. 진심이야. 그가 너를 많이 웃게 해주기를. 그 미소는 나에게도 가장 큰 행복이었으니까.
항상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너. 내가 힘이 들 때면 기대고 싶을 만큼 나를 위해 많은 걸 준비해 줬어. 심지어 나를 웃게 하는 강아지인형까지. 그런데 나는 너에게 갈 수 없어. 나는 그를 향한 걸음을 재촉해야 해. 그와의 거리가 멀어질까 봐 속도를 내야만 해.
오징어를 굽던 냄새에 한번쯤 뒤돌아보기도 했어. 그에게 가는 길이 쉽지 않았기에 너에게 기대어 펑펑 울고도 싶었지. 하지만 그 마음을 멈출 수는 없었어. 네가 정성껏 구워둔 소시지와 오징어는 말라비틀어진 채 나를 쏘아붙이듯 노려봤고 너는 그들을 조용히 말리며, 그에게로 떠나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어.
"나는 괜찮아."
그 말이 얼마나 슬픈 인사인지 그때는 몰랐어. 그리고 지금, 뒤늦게야 깨달았어.
내가 그를 기다린 만큼, 그에게 달려가던 만큼, 너도 나를 기다리며 설레고 행복했을 거라는 걸.
너도, 나도 모두 알고 있을 거야. 나는 네 마지막이, 너는 내 종착역이 될 수 없다는 걸. 그저 서로를 멀리서 지켜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라는 걸.
그런데 있잖아.. 이기적인 걸 알면서도 너에게 묻고 싶어. 정말 너무 버거울 날에는 잠깐 너에게 도망쳐도 될까?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토닥여 주고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내미는 네 품에서 잠시 쉬어가도 될까?
그를 향해 시속 120km로 달려가는 너, 나에게 올 땐 30km, 어린이 보호구역을 지나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와도 돼. 혹은 오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 너를 기다렸던 모든 날처럼, 그때도 날 지나쳐 다른 사람을 찾아가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