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클렌징

덧칠하기 전에 지워야 할 것들

by 북극곰

하얀 눈이 조용히 쏟아지던 12월의 어느 날, 갑자기 울린 너의 전화.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술 한잔 사달라는 네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귀찮았지만 평소와 다른 침울한 목소리에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검정색 롱패딩을 입고 꽁꽁 싸매고 널 만나러 가는 길,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거리는 하얗게 물들었고, 약속 장소인 자주 가던 동네 호프집에 들어갔다.


몇몇 테이블은 송년회에 들뜬 분위기였고, 몇몇 테이블은 삼삼오오 모여 소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조용했다. 왜 그러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저 네 소주잔을 채워주었고, 너는 말없이 소주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리고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헤어졌어."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진 것과 달리 너의 눈엔 마스카라가 번진 듯한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다. 그때 너의 눈물을 처음 본 것 같다. 슬픔을 가늠할 수 없고, 어떤 위로도 닿을 것 같지 않아 나는 그저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쉽게 사라지는 소주와 달리 이별의 상처는 그렇지 않았다. 눈처럼 덮을 수도, 술처럼 삼켜버릴 수도 없는 흔적. 너의 이별도 오래 남을 것 같았다.


"나 어떡하냐."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살아야지."


너의 얼굴엔 그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얼룩진 눈가, 희미하게 묻은 파운데이션. 다 지우지 못한 채로 온 너는 마치 누군가의 기억을 얼굴에 얹고 있는 듯했다. 말을 아끼던 내게 너는 말을 건넸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떠나도 너만은 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술에 취한 너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그 말이 취중진담이었는지 아니면 농담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마치 하늘에서 고요히 쏟아지던 눈 위로 던져진 작은 돌멩이 같았다. 조용히 쌓이던 눈 위에 커다란 발자국이 찍히듯 쿵! 내 마음에도 발자국을 남겼다. 너의 진심을 되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네가 헤어진 뒤로 연락이 잦아졌다. 가끔 안부를 묻는 정도였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너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너에게 위로가 필요할 수도 있고, 외로운 감정일 수도 있었으니까.


HAPPY NEW YEAR. 새해 첫날, 우리는 자주가던 호프집에서 함께 잔을 부딪히며 새해를 맞이했다. 유난히 추운 밤이었다. 12월에 내린 눈은 녹지 않아 빙판으로 변했고 거리는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에 잠겨 있었다.


"HAPPY NEW YEAR. 새해 복 많이 받아."

잔을 부딪히는 순간, 너는 문득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올해는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지난번 네가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 말은 내 가슴을 도장처럼 꾹! 눌렀지만 태연한 척하고 맥주잔을 부딪혔다. 그 이후 우리는 전보다 더 자주 통화했고, 만났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대화였다.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점심은 뭘 먹었는지, 별 의미 없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하지만 점점, 그 횟수가 늘어갔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설렜고, 만나기로 한 날이면 무심코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다봤다.


너를 만나러 가는 날, 큰 마음 먹고 산 오렌지색 립스틱을 발랐다. 봄처럼 설레는 마음과 달리 너는 잿빛이 되어있었다.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너는 여전히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는 걸.


너의 얼굴에는 지우지 못한 21호 파운데이션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아무리 내가 23호 색으로 덮어도 들뜨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너의 입술에는 분홍색 립스틱 자국이 남아있었다. 나의 오렌지색으로 감추기에는 너무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각질이야."


너는 손사래 치며 말했지만 너의 눈빛은 그 말을 부정하고 있었다.

나는 분홍색을 지우고 오렌지색을 덧입히고 싶았지만 그녀의 흔적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너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상황이 일어났을 뿐이었고 우리 모두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너는 아직, 누군가를 온전히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녀의 빈자리를 나로 채우려 했던 너의 방식은 너무 성급했고 이기적이까지했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도 밑빠진 독같은 너의 마음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겹쳐 바를 수 없는 두 색의 틈에서 나는 조용히 물러났다. 너와의 우정도, 사랑도 모두 포기했다.

이제 너에게 말하고 싶다. 화장은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지우지 않은 채 올린 새로운 색은 결국 벗겨지기 마련이다. 그 자리에 남은 건 흉터, 각질 그리고 모낭충 같은 간지럽거나 아픈 기억들이다. 내가 그녀를 대신한다고 해서 그녀가 네게 준 각질과 잔여물 같은 아픔까지 말끔히 지울 수는 없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너의 마음을 딥클렌징 해야 한다. 그 사람을 위해, 그리고 너 자신을 위해서도. 쌩얼이 조금 부끄럽더라도 지우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다음에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을 때, 깨끗한 다 민낯으로 가길 바란다. 잘 지워낸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것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법이니까.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얼굴로, 진심이 묻어나는 맨 얼굴로. 화산처럼 볼록 뾰루지가 올라오더라도 그것이 치유의 증거라면 누구든지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너를 떠나 나를 온전히 받아줄 사람을 찾아가려고 한다.
나는, 더 이상 들뜨는 마음 위에 사랑을 얹지 않기로 했다.


벚꽃이 휘날린다.

그녀의 립스틱을 닮은 분홍색 벚꽃이.
너의 얼굴에도 흩날리겠지.

아름다운 그 꽃잎이 내 어깨 위에는 내려앉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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