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어릴 적, 등산은 특별한 준비가 필요 없는 일이었다. 등산화 없이 운동화를 신고 반바지를 입은 채로도 충분히 산을 탈 수 있었다. 숨이 차올라도 개의치 않았다. 발 밑에 쌓이는 낙엽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힘이 들 땐 바람을 맞으며 "야호" 하고 소리치다 한바탕 웃기도 했다. 그 시절, 모든 것이 가벼웠고, 모든 순간이 기쁨이었다. 무거운 배낭도 없었고, 목표를 신중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앞을 보고 한 걸음씩 내디뎠고, 세상은 그 자체로 충분히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 산을 오르는 일은 완전히 달라졌다. 등산화를 신고, 장비를 갖추어도 걸음을 금세 무거워진다. 조금만 올라가도 숨이 가쁘고, 다리가 지쳐서 그 자리에 멈춰 서야 한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떼며 숨을 고르지만, 점점 더 무겁고 버거워진다. 몸이 내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 심장에서 지진이라도 난 듯 미친 듯이 뛰고 몸은 경호원처럼 나를 막아 걸음을 멈추게 한다. 에너지는 한없이 고갈된다. 이 길이 끝날까? 내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심장이 절망에 눌려 한숨을 쉰다. 나는 다시 한번 걸음을 멈춘다. 잠시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려 하지만, 그 시원함은 그저 잠시일 뿐. 내 몸은 여전히 목마르고, 힘들어하며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게다가, 앞을 가로막는 미세먼지. 이제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능숙하게 오를 수 없다. 시야는 뿌옇게 흐려지고, 기침이 계속 나며 눈도 따갑다. 눈물마저 흘러내리는데, 그것조차 닦을 힘이 없다. 한참을 걸어도 미세먼지 속에서 길을 찾는 건 점점 더 어려워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산이 변한 걸까, 아니면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달라진 걸까.
어린 시절에는 목표가 가까웠고, 원하던 것이 손닿을 곳에 있었다. 그래서 산이 낮게만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이제는 더 먼 곳을 향하고, 더 높은 곳을 꿈꾸기에 같은 길도 유난히 가파르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산은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변한 것은, 더 넓은 세상을 보고자 하는 나의 마음일지도.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오르는 나의 마음은 달라졌다. 어린 시절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올랐다면, 이제는 한 걸음 한 걸음에 깊은 의미가 스며든다.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마다 순간의 소중함이 더욱 와닿고, 때로는 정상에 도달하는 것보다 그 과정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날도 있다.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쉬어 가며 풍경을 보고, 산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놓는다. 깊은숨을 들이쉬며,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본다. 정상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언젠가는 정상에 닿을 테고, 그 길 위에서 이미 많은 것을 얻었으니까.
시간이 지나, 미세먼지가 걷힌 하늘을 본다. 맑고 푸른 하늘 속에서 다시 숨을 깊게 들이쉬며, 산이 나를 품어주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싱그러운 나뭇잎 향기가 내게 다가오고, 그 향기를 맡으며 몸과 마음도 조금씩 회복되는 것 같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 내딛는다. 예전처럼 가볍게 오르지는 못하지만, 나는 나만의 속도로 걸어 정상에 닿는다. 어렵사리 도착한 정상에서, 땀에 젖은 몸을 이끌고 조용히 정자에 앉는다. 미풍이 살랑이며 스쳐 지나가고, 그 순간 한 등산객이 다가와 시원한 오이를 건넨다. 작은 배려에 서서히 힘이 돌아오는 걸 느낀다. 상쾌한 오이가 목을 타고 넘어가며, 피로와 갈증까지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다보는 풍경을 바라본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거쳐야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는지, 그동안 쌓여온 노력과 시간들이 떠오른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며, 앞으로도 천천히, 그러나 계속해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산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고, 나는 오늘도 그 산을 향해 나아간다.
산은 여전히 거기 있고, 나는 묵묵히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