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책갈피로 남겨진 시간들

by 북극곰

인생은 한 권의 책과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페이지를 넘기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정말 행복한 순간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조심스레 책갈피를 꽂아두기도 하고 힘이 들 때면 그 책갈피를 따라 다시 그 페이지를 펼쳐 보기도 한다. 그때의 따뜻함과 환한 빛을 마음에 물들이고 위로를 받기 위해서.


나는 2010년, 스페인과 아일랜드에서 보냈던 시간에 책갈피를 끼워두었다. 낯선 도시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웃고, 걷고, 포옹하며 나눴던 순간들. 그곳에서 나는 자유로웠고, 환하게 빛났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환영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에 나조차 잊을 만큼 환하게 빛났던 날들. 마치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 놓은 듯, 그 기억들은 유난히도 선명했다. 나는 그 색이 바래지 않기를, 오래도록 빛나기를 바라며 책갈피에 끼워두었고 힘들 때마다 그 페이지를 다시 펼쳐보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책갈피 속 기억도 조금씩 옅어졌다. 선명하던 장면들은 점점 흐릿해졌고, 눈앞에 닥친 현실의 무게는 그 시절의 따뜻함보다 훨씬 더 크게 다가왔다. 한때는 다시 펼쳐보며 위로를 받던 순간들이, 이제는 오히려 지금의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토록 환하게 빛나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일상의 무게에 눌려 숨을 고르는 일조차 버거워져 있었다. 그 시절의 장면들은 더 이상 위로라기보다는,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동경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책갈피가 꽂혀있던 페이지는 그저 한때의 따뜻함을 떠올리게 할 뿐, 더 이상 나를 앞으로 이끌어주는 힘은 아니라는 것을.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장면이라도, 그 자리에 머무르기만 하면 이야기는 멈춰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빛나던 순간을 끼워두었던 책갈피를 조용히 빼고 아직 쓰이지 않은 빈페이지를 마주하려고 한다. 지금의 나는 그때만큼 빛나지는 않지만 아직 펼쳐보지 않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고, 그 위에 나는 또 다른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으니까.


훗날 언젠가 내 인생이라는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는 날이 왔을 때, 그 책에 멋진 문장이나 위대한 순간이 담겨 있지 않더라도, 내가 그 시간을 진심으로 살아냈다면 충분할 것 같다. 중요한 건 빛났던 과거가 아니라, 그 기억을 품은 채 오늘을 살아가는 나 자신일 테니까.


그래서 나는 이제 책갈피 대신 볼펜을 든다. 오늘이라는 페이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기 위해서. 그 글자들이 아름답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 속에 나만의 흔적을 남기려 한다. 시간이 지나 다시 이 페이지를 펼쳤을 때, 그때의 감정과 빛이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그 흔적들이 내게 여전히 의미 있기를 바라며, 나는 앞으로도 내 삶의 매 페이지를 꾸준히 써 내려갈 것이다. 그 페이지 위에 내일의 나를 위한 이야기가 쌓여가며, 그 속에서 나의 빛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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