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려지는 것들 속에서도
7년 전, 건강검진을 받았다. 한 달 후 결과지는 이메일로 도착했다. 아무렇지 않게 모니터 속 글자를 내려가던 내 눈이 한 문장에서 멈춰 섰다.
"양측 안저에서 녹내장 유사 시신경유두가 관찰되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모습일 가능성이 높으나, 간혹 녹내장으로 인해 새로 생길 수도 있습니다.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6~12개월 후 추적 검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검사결과를 읽는 순간, 마음이 묘하게 흔들렸다. 녹내장은 유전적인 요인이 크기 때문에 선천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고 근처 안과로 향했다.
검사는 길고도 낯설었다. 동그란 원 가운데 고정된 주황색 불빛을 응시하며 녹색 불빛이 깜빡일 때마다 버튼을 눌렀다. 왼쪽, 오른쪽 각각 10분씩 진행되었다. 안압 검사, OCT, 현미경 검사, 정밀 안저 검사, 전안부 촬영, 굴절 및 조절검사, 광각 안저 촬영 등 익숙하지 않은 검사들을 1시간 정도 검사를 했다. 검사가 끝난 후 나는 녹내장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녹내장은 완치할 수 없는 병이다. 안약을 꾸준히 넣고 안압을 최대한 낮추어 시신경 세포 손상을 늦추는 것, 한 달에 한 번 안압을 체크하며 점검하는 추적 검사가 최선이라고 했다.
그리고 몇 달 전, 다시 안과를 찾았다. 1시간이 넘는 정밀검사를 마친 후 원장님과 상담을 했다.
"평소에도 시야가 많이 뿌옇고 흐린가요?"
나는 그렇다고 했다. 마치 안경 렌즈에 지문이 묻어 있는 것처럼, 속눈썹이나 눈꺼풀이 시야를 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원장님은 순간 멈칫하며 대학교에서 배운 녹내장 이야기를 꺼냈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속으로 생각했다. 결과가 좋지 않아서였다. 보통 녹내장 초기에는 코 주변으로 먼저 진행되는데, 내 경우는 이미 조금 더 진행된 상태였다. 약국에 들러 처방받은 안약을 챙기고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 길이 어쩐지 길어 보였다. 시야가 흐려지고 나서 세상이 그렇게 멀어 보였던 적은 처음이었다.
집에 돌아와 여느 때처럼 씻고 자기 전 안약을 넣는다. 한 두 방울 넣고 깜빡. 깜빡. 눈이 시려 고개를 들고 몇 초 동안 눈을 감고 있는다. 깜깜한 어둠 속, 미세하게 빛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마음에도 시야가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작은 불안에 흔들리고, 사소한 말에 상처받아 마음의 문을 닫게 되는 마음의 시야도 조금씩 어두워진다.
마음의 신경도 손상되면 회복 쉽지 않다.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접게 된다. 가까웠던 사람조차 멀게 느껴지고, 세상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게 느껴진다. 마치 시야의 가장자리가 조금씩 검게 물드는 것처럼, 마음의 시야도 조금씩 좁아진다.
마음의 시야가 그렇게 좁아지는 것을 느낄 때, 문득 깨달았다. 눈을 지키듯, 마음도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매일 밤 안약을 넣듯이, 마음에도 하루 한 방울씩 ‘다정함’을 넣기로 했다. 내게 상처를 주지 않는 말,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 다시 떠올려도 웃을 수 있는 순간들. 그리고 나를 위로해 주는 말, 아무 일도 아니란 듯 건넨 한마디가 힘이 되어준 날들.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 조용히 담는다. 마음의 신경이 더는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정함을 보탠다.
나는 앞으로 시야가 더 흐려지게 될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멀고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의 눈을 감지 않고, 조심스레 떠보려 한다. 흐릿한 세상 속에서도 마음의 시야만은 좁아지지 않기를. 끝까지 따뜻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기를. 비록 눈으로 보는 세상은 흐려질지라도, 내 마음의 시야는 언제까지나 2.0으로 남아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