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속에 남아있는 고민들
1999년, 노스트라다무스가 지구 종말을 예언했던 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기 전, 우리는 늘 학교 근처 오락실에 들렀다. 몇몇 친구는 노바소닉의 '또 다른 진심'을 들으며 펌프 위를 뛰었고, 또 다른 친구는 스트리트파이터에서 ‘아도겐’을 날리며 눈앞의 조이스틱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화려한 기술을 뽐냈다.
나는 오락실 입구에 있던 오토바이 주행 게임을 좋아했다. 교복 치마 위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오토바이에 올라타 양팔을 힘껏 벌린 채 그 시절 최고의 인기 영화 비트 속 정우성을 흉내 내곤 했다. 달리는 화면 속 풍경이 끝나갈 무렵, 게임이 끝났고 나는 책가방을 챙겨 오락실을 나서려 했다. 집으로 향하려던 그때, 익살맞은 한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서~ 그냥 가면 숏다리야."
두더지 게임기에서 들려오는 장난스러운 음성에 웃음이 나왔지만 주머니엔 동전 하나 없었고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었고. 중학생 시절의 추억은 머나먼 기억으로 밀려났다.
몇 년 전, 친구들과 술을 마신 후 집으로 가는 길, 우연히 또 다른 오락실 앞을 지나치다,
“서~ 그냥 가면 숏다리야!”
낡은 기계에서 튀어나온 익숙한 음성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 목소리가,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데자뷔처럼 지금 이 순간으로 끌어당겼다.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는 두더지 게임기는 여전히 같은 목소리로, 과거의 나를 불러 세우듯 내 발목을 붙잡았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어릴 적엔 그냥 지나쳤던 그 기계를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500원짜리 동전 두 개로 바꾸었다. 그리고 동전을 넣고 옆에 걸린 뿅망치를 들었다. 손에 묵직한 감촉이 느껴졌다.
경쾌한 음악소리와 함께 귀여운 두더지가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었다. 망치를 휘둘러 명중시키면 "왜 때려"라는 짧은 외침과 함께 다시 굴속으로 숨어들었다. 하나를 내리치면 때리면 또 다른 두더지가 튀어나오고 때때로 타이밍을 놓쳐 때때로 허공만 내리치기도 했다.
살다 보면 참 많은 고민과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고개를 들고, 간신히 해결했다고 믿었던 문제들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툭 튀어나온다. 때로는 한꺼번에 많은 두더지가 튀어 오르기도 한다. 어떤 두더지를 먼저 잡을지는 결국 나의 선택이다. 그 선택이 항상 정답은 아닐지라도, 헛스윙 끝에 얻은 긴 깨달음으로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다시 집중한다.
두더지는 또다시 튀어 오르고, 나는 또 망치를 들었다. 스무 번쯤 망치를 휘두르고 나서야 게임이 끝났다.
두더지는 모두 굴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내 삶의 문제들이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임 속 두더지는 사라졌지만, 내 안의 고민들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렇지만 괜찮다. 내 손에는 아직 500원짜리 두 개의 동전이 있으니까.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