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설런트 아이스크림

From 프렌치바닐라 To 바닐라

by 북극곰

냉동고문을 열었다. 가지런히 놓인 상자 안에 열 개의 엑설런트 아이스크림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노란색 프렌치 바닐라맛 다섯 개, 파란색 포장지에는 연한 바닐라맛 다섯 개.


처음 나는 늘 노란색 포장지의 프렌치바닐라맛 아이스크림만 골라 먹었다. 햇살처럼 밝고 부드러운 노란 껍질 속의 진한 달콤함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제대로 알아가기도 전에 마음이 앞섰고 다정한 말 한마디, 사소한 배려 하나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씌우며 진하고 깊은 달콤함에 취해갔다. 진하고 깊은 감정에 쉽게 취해버렸고, 그가 가진 ‘좋은 면’만을 부각하며 그 반짝임을 사랑이라 착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마치 노란색으로 포장된 아이스크림처럼 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땐 그랬다.

그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 가슴이 뛰었고 사소한 배려에도 운명이라는 이름을 덧씌웠다. 장점은 찬란하게 반짝였고, 단점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가 웃을 때마다 세상이 밝아지는 줄 알았고 내게 건네는 말들마다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가 손을 뻗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조심성도 경계도 없이, 마음을 다 풀어놓고 그저 ‘이 사람이면 될 것 같다’는 확신 하나로 사랑에 빠졌다.


보고 싶은 모습만을 포장지처럼 덧씌우고 내가 만들어낸 환상을 마치 그 사람인 양 착각했다. 사랑은 그를 향한 감정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나 혼자 쏟아낸 감정의 집합이기도 했다. 뜨겁고 부풀어 오른 그 감정이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서부터 착각이었는지 그때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의 포장지는 천천히 벗겨지기 시작했다. 문자 회신이 늦어졌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의 온도도 10도쯤 내려간 듯했다. 예전엔 귀엽게만 보이던 말투가 습관적인 말장난처럼 바뀌었고 내게만 진심일 거라 믿었던 말들이 진심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도록, 내가 빠지도록 그는 자신을 포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게, 달콤하게 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외로움에 나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진짜 그를 마주했다.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현실이 한꺼번에 선명해지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깊은 슬픔이 밀려와 눈물이 앞을 가렸다. 반짝이던 포장지 뒤에 감춰져 있던 그의 모습이 그제야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마음에 상처가 남았다. 더는 애써 눈감아 줄 수 없었고, 우리 사이의 거리도 점점 벌어졌다. 그렇게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달콤했던 설렘은 어느새 옅어졌고, 남은 감정은 파란색 포장지 속 밍밍한 바닐라처럼 메마른 채 남아 있었다.


차가워진 우리는 잠시 우리의 관계를 얼려 두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 서서히 녹아 없어질 줄 알았던 차가운 마음은 더 단단해지고 얼어붙었다. 성에 낀 감정은 손끝으로도 녹지 않았고, 결국 좁혀지지 않는 거리 앞에서 우리는 조용히 이별을 택했다.


그가 떠나고, 다시 냉동고 문을 열었다. 그 안엔 파란색 포장지의 아이스크림 다섯 개만이 남아 있었다. 처음엔 노란색 프렌치 바닐라처럼 특별한 달콤함에 빠져 그의 장점들만 보고 싶어 했지만, 이제는 남은 파란색 바닐라맛 아이스크림처럼 그의 단점들만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처음엔 프렌치 바닐라 맛인 줄 알았지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달콤함은 옅어지고 결국엔 평범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담담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빛나던 프렌치 바닐라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차갑고 무덤덤한 이별뿐이었다.


아이스크림은 엑설런트였지만 우리의 마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서로가 특별하다고 믿었던 순간은 그저 달콤한 착각에 불과했다.

현실은 생각보다 디퍼런트 했고, 우린 끝내 아무 말 없이 사일런트한 이별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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