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는 것, 머문다는 것.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하루를 분명히 살아냈는데도, 어디에도 닿지 않은 기분이 드는 날. 눈을 뜨고,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사람들과 웃고 헤어졌지만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마음 한쪽에서 묘한 허무함이 밀려온다.
분명 열심히 움직였는데, 왜 이렇게 제자리인 것 같을까. 그럴 때면 러닝머신이 떠오른다. 발은 쉬지 않고 움직였고, 땀도 흘렸고, 속도도 거리도 기록으로 남았지만 앞으로 나아갔다는 실감은 나지 않았고 창밖 풍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고 익숙한 조명 아래, 같은 자리를 돌고 또 도는 기분.
러닝머신은 그런 점에서 참 아이러니하다. 분명히 움직이고 있지만, 그 움직임은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안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예상치 못한 돌부리에 발이 걸릴 일도, 낙엽에 미끄러질 위험도 없다. 예측 가능한 환경,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나는 안정감이라는 이름의 안식처를 얻는다.
하지만 가끔은 그 ‘예측 가능함’이 내 삶을 조금씩 무디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달리기만 하는 느낌. 속도는 있지만, 방향은 없는 그런 날들이 반복되면서 문득, 산을 오르는 일이 떠올랐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불규칙하게 반복되는 길. 어느 날은 따가운 햇볕 아래를, 또 어떤 날은 비바람 속을 걸어야 했다. 한 번은 등산 중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옷이 흠뻑 젖고, 추위에 벌벌 떨었던 적도 있었다. 흙길은 진창이 되었고 도망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어 그저 이를 악물고 걸었고 실내의 익숙한 조명 아래서 그저 발만 움직이면 되는 러닝머신이나 탈걸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비는 기억 속에서 천천히 다른 얼굴이 되었다. 젖은 흙길 위를 묵묵히 걷던 발끝, 비에 씻긴 나무들과 잎사귀 사이로 번지던 초록빛, 그리고 비가 그친 직후, 코끝에 와닿던 그 묘한 흙냄새. 마치 자연이 조용히 내게 건넨 위로 같았다. "잘 버텼다"라고, "수고했다"라고. 그건 땀보다 더 깊이 스며드는 감정이었다. 힘든 순간을 통과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요하고 짙은 기쁨.
후회하며 걷던 그 순간들이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날의 비와 떨림, 미지근한 물 한 모금조차 모두 선명한 추억이 되었다. 그 모든 날씨와 길 위의 우연들 속에서 진짜 변화가 찾아온다는 점이다. 한 걸음 오를 때마다 풍경이 달라지고, 구름이 걷히는 순간 펼쳐지는 시야는 러닝머신 위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산길은 예측할 수 없다. 늘 불편하고, 종종 위험하며, 걷는 동안 수없이 후회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길일수록 내가 지나온 흔적이 더 분명하게 남는다.
삶도 그러지 않을까. 날씨처럼 변덕스럽고, 예고 없이 몰아치는 바람 앞에서 우리는 방향을 고민하고, 때론 멈추기도 하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러닝머신과 산길. 하나는 움직이지만 변하지 않는 길, 다른 하나는 변화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길. 어느 쪽이 더 낫다고는 말할 수 없다. 러닝머신 위에서도 땀은 흐르고, 산길 위에서도 후회는 생긴다.
결국 삶이란 건, 어느 길을 택하든 고단함과 보람이 나란히 따라붙는 여정이니까. 오늘 내가 선택한 방식이
내일의 나를 어떤 풍경 앞에 데려다 놓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그 길을 걷는 걸음 하나하나에
나의 이야기가 새겨진다는 것이다.
때로는 안전한 루틴이 필요하고, 때로는 낯선 풍경이 그리워진다. 그 선택은 결국 내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