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t lag(시차증)

맞지 않는 시간 속에서

by 북극곰

스물두 살의 여름, 친구와 함께 유럽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첫 여행지인 아일랜드에 도착했을 때, 시차는 무려 8시간.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길, 차가 왼쪽 차선을 달리고 운전석이 반대쪽에 있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바뀐 방향 속에서 풍경도 낯설게 흘렀고, 몸은 여전히 한국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침대에 쓰러졌고, 하루 종일 잠만 자다가 밤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 첫날은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 아름다웠을 풍경은 흐릿하게 지나가고, 그곳의 첫 인상은 피곤함과 어지러움뿐이었다.

낯선 나라에 도착하면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감각이 있다. 몸은 여전히 이전의 시간에 머물러 있고, 낮에는 이유 없이 졸리고, 밤이 되면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몸과 마음은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어딘가 어긋난 상태로 남는다. 이 어긋남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흐트러뜨린다.

아름다운 풍경도 피곤한 눈엔 흐릿하게 보이고 기대했던 장소도 기분 좋은 감탄보다 멍한 혼란으로 지나쳐버리곤 한다. 여행의 첫인상은 설렘보다 불편함일 때도 있다. 졸음과 어지러움 속에서 낯선 도시에 대한 기억은 흐려지고 결국 그 하루는 피곤과 아쉬움만 남긴 채 지나간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이와 닮았다. 처음 마주한 타인의 세계는 낯설다. 말투가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감정의 결도 다르다. 아무리 가까워지고 싶어도 마음이 스치지 않고 상대의 웃음에 어색하게 웃고 내가 건넨 말이 왜 상처가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멍해지는 순간들이 반복된다. 마치 생체 리듬이 전혀 다른 시간에 맞춰져 있는 사람들처럼 아직 출발지의 시간에 머무른 채, 서로의 세계에 온전히 발을 들이지 못하고 부유한다.

하지만 그 어색함 속에서도 시간이 주는 힘이 있다.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상대의 유머에 나도 웃게 되며 미묘한 표정 변화에서 감정을 읽고, 대화의 간격이 자연스러워진다. 마치 어느 날 문득 그 나라의 아침 햇살이 익숙하게 느껴지고, 식당에서 주문하는 손짓이 어설프지 않아지는 순간처럼.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시간에 천천히 서로를 맞춰간다.


관계란, 누구 한 사람이 무리하게 적응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천천히 리듬을 맞춰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억지로 참고 일정을 밀어붙이는 여행이 아니라 햇살의 방향에 몸을 기울이고 조용한 오후의 공기를 느끼는 여유처럼 겸손한 기다림과 조율의 마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여행이 끝내 즐거워지지는 않듯 모든 관계가 끝까지 조율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나라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고 어떤 사람과는 끝내 시차가 맞지 않기도 한다. 그럴 땐 애써 억지로 적응하려 하기보다 조용히 짐을 싸고, 나에게 더 잘 맞는 여행지를 향해 떠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맞지 않는 관계에 오래 머무르다 보면 풍경도 흐릿해지고 마음도 지친다. 여행이 본래의 의미를 잃듯, 관계 또한 소중한 의미를 잃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시간에 천천히 귀 기울이며 걸어가되 끝내 맞지 않는 길이라면 기꺼이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릴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언젠가 깨닫는다. 여행이든 관계든, 모든 것이 반드시 우리의 시간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맞지 않는 곳에서 억지로 머무르기보다, 나에게 맞는 장소와 사람을 찾아 떠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새로운 여행지에서 우리는 다시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새로운 시간 속에서 나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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