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이어도 괜찮아
어렸을 때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 돌아오는 말은 늘 ‘네가?’였다. 나는 공부에 큰 소질이 없었고, 방학식 날 받는 성적표엔 마치 양떼목장을 옮겨놓은 듯 빨간 ‘양’자가 줄줄이 박혀 있었다. 반면 언니는 수학도 잘하고 과학도 척척 해내는 아이였기에, 나는 늘 비교 속에서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끼며 살았다.
그런 환경 속에서 점차 ‘나는 안 될 거야.’ 라는 마음이 익숙해졌고 언젠가부터 꿈을 말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난 파티쉐가 될 거야.’ ‘난 기자가 되고 싶어.’ 가까스로 용기 내어 말하면 가족들과 친구들은 의심하거나 비웃었다. 결국 나도 내 꿈을 믿지 못했다. 친구들의 말에 휩쓸려 쉽게 포기했고,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무너지기도 했다. 응원 한 번 받지 못했던 꿈은 점차 꾸는 법조차 잊어갔고 나는 그것을 가슴 깊숙이 꽁꽁 묶어두고 꺼내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국어 시간, 장래 희망을 주제로 시를 써야 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나는 고종수 백텀블링 세레머니에 완전히 매료되며 그의 열혈 팬이 되었다. 그 열정은 프로축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경기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특히 1999년 수원삼성의 김호 감독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선수들의 기량을 끌어내고 팀을 하나로 묶는 그의 리더십은 감독이라는 존재가 단순한 ‘어른’이 아닌 ‘꿈을 지지해주는 사람’으로 다가왔다.
나는 망설임없이 ‘축구선수의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시를 써서 제출했다. 내 꿈은 축구감독이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꿈을 믿어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그 시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국어 선생님께서 내 시를 보고 ‘교내 시화전’에 출품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얼떨떨했다. 각 반에서 2명만 나갈 수 있는 시화전에 ‘감히 내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교실 뒤에 그림 한번 걸려본 적도 없는데 전교생이 다 보는 시화전에 나가는 것이 자랑스럽기보다 부끄럽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어 선생님은 출품 규격을 하나하나 설명하시며 “글씨는 또박또박, 깔끔하게 써야 해. 시화전에선 그런 것도 중요하단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작년 수상자들이 학교 앞 제본업체에 맡겨서 정성껏 작품을 만들었다는 팁까지 건네주셨지만 내겐 그마저도 너무 막막하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내 글에 귀를 기울여 준 순간이었지만, 그 기대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부모님께 말씀드릴까 몇 번이고 고민했지만 끝내 조용히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다. 하루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담긴 부모님의 지친 얼굴을 보니 입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히 말 꺼냈다가 부담이 될까 봐, 혹시라도 마음 쓰실까 봐 조심스러웠다.
기쁜 마음보다 걱정이 먼저 앞섰고, 시화전 이야기는 나만의 조용한 비밀이 되어버렸다. 순간의 설렘보다 부모님 걱정이 먼저 떠오르는 내가 살짝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게를 덜어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기에 홀로 시화전을 준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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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빛나던 누군가가 있었다.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은 것을 품어내던 그 모습. 그 빛을 더 빛나게 해주는 부모님의 사랑과 응원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까지 빛나버리면 너무 눈이 부셔 부모님이 운석이 되어 별똥별처럼 사라질지도 몰라.‘
나는 조용히 그늘이 되어 남기를 택했다. 조금 어두워도 그 자리가 익숙했고 덜 눈부신 만큼 덜 불안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위로하고 합리화했다. 일주일동안 100원, 200원씩 용돈을 모아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패널을 사고 친구에게 파스텔과 매직을 빌려 직접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삐뚤빼뚤 글씨를 시를 적었다. 조용하고 서툴렀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처음 꿈을 꺼내 보인 순간이었다.
축제가 열린 날, 친구들과 교실 한쪽에 걸린 모든 시화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반짝이고 완벽하게 제작된 작품들 사이에서 내 작품은 삐뚤빼뚤한 글씨와 흐릿한 색감 때문에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마치 명품 가방 사이에 낡고 해진 짝퉁 가방이 섞인 듯 부족하고 어설픈 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나는 수상의 영예를 안지 못했고 초라함만 더 크게 드러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 일을 계기로 꿈을 꾸는 방법을 조금씩 잊어갔다.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지만 ‘내가?’라는 의심 앞에 한 걸음도 쉽게 떼지 못했고 도전보다는 현실에 타협하는 쪽을 선택하며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꿈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깊숙이 숨겨둔 채 다시 꺼내는 법을 잊어갔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나를 믿지 못하는 못된 습관이 생겼다.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다시 새로운 꿈을 꾸려고 할때마다 설렘보다는 불안과 의심이 먼저 찾아왔다.
‘내가 이걸 꿈꿀 자격이 있을까? 정말 해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늘 나를 옭아맸고 발걸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서성이게 했다. 누군가가 비웃기 전에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내가 만든 한계 안에 스스로를 가둔채 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나 자신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용돈을 모아 문구점에서 패널을 사고, 친구에게 파스텔을 빌려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꾹꾹 눌러썼던 그 순간. 누군가의 눈엔 어설프고 초라해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분명 나에게 처음으로 건넨 순수한 꿈의 조각이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축구선수의 어머니’라는 시. 어린 소녀가 엉성한 패널 하나에 얼마나 많은 용기를 담았었는지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25년이 지난 지금, 아주 가끔 그때의 소녀를 떠올린다. 만약 그 아이와 다시 마주할 수 있다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다가가 안아주고 싶다.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천방지축 같았겠지만 늘 자신을 믿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작게만 여겼던 그 아이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넌 정말 잘했어. 비록 엉망이었지만, 그게 너라서 아름다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