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친절한 사람들에게만 친절하세요.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한 장면이 내 마음속을 사로잡았다. 3년 넘게 안정적인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매너리즘에 빠졌고 실수를 하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하며 출근을 했었다.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약간의 아부도 필요하고 엿가락처럼 살짝 굽는 유연함도 있어야 한다지만 나는 다행 중 불행으로 그게 잘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속 노란 트램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경쾌하게 종소리를 울리며 리스본 언덕길을 오르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내가 품고 있던 씁쓸한 감정을 씻어내 주는 것만 같았고 영화 속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의 발걸음을 따라 리스본에서 나의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발걸음을 좇는 내내, 나에게 물었다.
나를 움직이는 건 무엇일까.
새로운 길로 이끌 작은 순간은 어디에서 올까.
인생이란 거대한 물결이라기보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흐름을 이루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나도 내 자리를 찾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안정적인 직장이었고 누군가는 신이 숨겨둔 직장이라고 했지만 평양 감사도 본인 싫다면 그만인지라 마음이 가는 곳으로 향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음표 대신 마침표를 찍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퇴사 후, 포르투갈 언어와 문화를 공부했고 리스본행 기차 대신 비행기에 올랐다. 설렘과 기대를 안고 도착한 리스본은 영화 속에서 보던 알록달록하고 따뜻한 풍경과는 조금 달랐다. 포르투갈어로 환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온 건 퉁명스러운 말투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도루강 주변의 작은 레스토랑 웨이터는 상그리아 잔을 테이블 위에 툭툭 던지듯 내려놓았고, 아이스크림 가게의 직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거스름돈을 퉁명스레 내밀었다. 게스트하우스 리셉션의 직원은 말을 아꼈고, 그의 눈빛에서는 묘한 경계심과 냉담함이 묻어났다.
나는 그 순간마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일반화하지 말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이야.”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가면 누구든 친구가 되고 서로의 경험을 공유할 거라고 믿었다. 낯선 도시에서 우연히 마주한 사람들과 친구가 된 적도 있었고, 우연한 만남이 인연이 되어 이제는 작지만 따뜻한 기적으로 오래 남아 있으니까.
게다가 "포르투갈 사람처럼 친절한 민족도 없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왔기에 리스본에서도 자연스레 그런 만남을 기대했었나 보다. 하지만 현실은 그 기대를 천천히 비껴갔다. 몇 번의 불쾌한 경험들이 반복되자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무너졌다.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어도, 입 안에서 침을 모을 수는 있겠구나.' 농담처럼 떠오른 그 생각이 웃음이 났다.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 보려 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말조차 아끼게 되었다. 되돌아오지 못한 공허한 인사를 건네는 것도 점점 지쳤다. 그러다 여행을 오기 전 책에서 읽었던 한 문장이 불현듯 떠올랐다.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들에게만 친절하세요.”
처음에는 그 말이 꽤 차갑게 느껴졌다. 마치 세상과 선을 긋고, 마음을 닫으라는 경고처럼 들렸으니까. 한동안 그 문장은 마음 한 켠에 걸린 채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의 상처를 겪고 나서야 그 말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애쓰며 다가갈 필요도 없고 내 진심을 가볍게 여기는 이에게 억지 미소를 건넬 필요는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다음부터는 마음을 조금 달리했다. 굳이 나를 잘 보이려 애쓰지도, 먼저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호의를 먼저 베풀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나 스스로에게 허락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거리의 표정과 사람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자 이상하게도 여행이 더 즐거워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걷는 리스본의 골목은 그제야 비로소 나를 환대해 주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영화 속 그레고리우스를 꽤 오래 따라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역시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에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랐고 예상하지 못한 낯선 감정들과 마주하며 그 감정들이 자신을 어디로 이끄는지 서서히 알아갔다.
나 또한 그랬다. 영화처럼 따뜻하고 로맨틱한 리스본을 기대 했었지만 현실은 다소 낯설고 거칠었다. 낯선 반응들 속에서 내 마음을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되었고 조금씩 나를 이해하고 다듬을 수 있었다. 나 역시 조용히 나를 알아가는 여행을 시작한 셈이었다.
“어느 장소에 간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여행을 간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삶을 살아 간다.(리스본행 야간열차 中)”
세상을 향한 기대도 사람에 대한 믿음도 내가 원하던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다. 어쩌면 그건 나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반응에 상처받는 대신, 이젠 내 마음에 더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조금 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나를 믿으며 이야기를 채워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