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감옥, 열려라 참깨
언제부터였을까. 내 마음은 천천히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출근길 지하철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어제와 같은데, 나는 흐릿한 안갯속에 갇힌 듯했다. 늘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나의 한계보다 앞서갔고, 감정은 제어하지 못한 채 마구 쏟아냈다. 열심히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 믿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아무리 진심을 다해도 세상은 내 뜻대로 흘러주지 않았다.
20년 넘게 이어졌던 우정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졌고, 마음 한편 내어준 사랑이라는 이름의 배는 어느 날 말없이 다른 항구로 향해 떠나갔다. 늘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진 자리에는 무력감만이 남았다.
그런 날이 지속되다 보니 상처받지 않으려고 마음의 문을 하나둘 닫게 되었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었던 나는 조심스럽게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했고, 문을 하나씩 닫을 때마다 내 안의 감정도 하나씩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슬픔, 분노, 우울. 그리고 기쁨, 환희, 설렘까지도. 어느 순간, 내 안에는 어떤 색도 남지 않았다. 모든 감정이 서서히 사라져 가며, 나는 잿빛 속에 머물렀다.
처음엔 그 고요가 오히려 평화롭게 느껴졌다. 감정이 희미해지고 웃음도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무뎌진 그 상태는 뜻밖에도 안정적이었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환희도 점점 멀어졌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낯설게 느껴졌고, 그렇게 좋아하던 치킨도 더 이상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감정 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잿빛의 관찰자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게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다가왔고, 마치 회색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선명해야 할 감정들은 뿌옇게 흐려졌고, 웃음소리마저 산속 메아리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기쁨도 슬픔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하루를 무감각하게 견뎌냈다.
혹시 마음이 열릴까, 마음을 여는 주문 ‘열려라 참깨’의 비밀번호를 수도 없이 바꾸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그리고 나조차도 나가지도 못하는 감정의 감옥을 만들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경계 안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유리막의 선에 선을 그으며 감정을 살짝 숨겼다. 스스로 그 선을 견고히 쌓아 올리는 동안, 내 마음의 색도 서서히 흐려져 갔다.
이따금, 아주 가끔씩, 잿빛 속에 검은색이 드리울 때가 있었다. 예고 없이, 갑자기. 모든 빛을 삼키는 심연 같았다. 잊었다고 믿었던 과거의 아픔이나 상실감이 번져 나갔다. 맑은 물 위로 떨어진 물감처럼 조용했던 내 안은 순식간에 차가워지고 캄캄한 어둠만이 내면을 채웠다. 그리고 터져 나왔다. 눌러왔던 시간들이 무너졌다. 투명한 눈물이 두 뺨에 흘러내렸다. 잿빛 속에서는 흐르지 않던 눈물이었다.
이 눈물을 다 흘리고 나면, 나는 다시 잿빛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마음의 문을 조용히 닫고, 아무 일 없는 듯 하루를 지나가겠지만, 때로는 이따금씩 찾아오는 눈물이 조용히 내가 살아 있음을 속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