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떨이의 위로
오늘도 수많은 사연들이 내 위로 피어오른다. 내게로 다가오는 얼굴들에는 웃음 대신 옅은 슬픔이나 깊은 회환이 서려 있고, 때로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남모를 고통이 그들의 눈빛과 입술 끝에 매달려 있는 듯 보인다.
나는 그들의 사연을 직접 듣지 못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연기만 깊이 들이켜는 사람, 이마에 내천(川) 자를 그리고 눈썹이 한껏 올라간 채 불만을 토해내는 사람, 하늘은 높고 푸르지만 오직 발끝만 바라보며 침묵하는 사람까지.
손가락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하얀 막대기가 붉은 불씨를 머금고 희뿌연 연기를 토해낼 때마다, 그 끝에 매달린 감정들이 내 안으로 툭, 툭 떨어진다. 재처럼 바스러지는 분노, 입술 끝에서 맴돌다 흩어진 말들이 연기와 함께 회색빛 재가 되어 나를 채운다.
내 위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를 보면서 가끔 생각한다. 어떤 이의 밤이었을까. 긴 하루 끝에 혼자 외로움과 마주 앉아 생각이라는 불씨를 붙이고 숨처럼 빨아들였던 감정들. 어떤 이에게는 그저 습관이고, 어떤 이에게는 잠시의 도피였을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자리에서 수많은 이들의 밤을 목격한다. 때로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내던져지는 절망을, 때로는 깊은 한숨과 함께 스러지는 체념을 본다. 눈빛이 흔들리고, 어깨가 축 늘어지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그저 묵묵히 그들의 감정 조각들을 받아내고 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는 순간을 함께하고, 그들의 연약한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에 미묘한 우월감을 느낀다.
나는 그저 꽁초를 담는 재떨이지만 이곳에 버려지는 재와 마지막 한 모금이 한 사람의 무거운 감정들이었음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소망한다.
마지막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일 때 재와 함께 모든 묵은 감정도 이곳에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돌아갔으면 좋겠다. 내 위에서 마지막 연기를 내뿜으며 사라지는 모든 슬픔과 고통이 더는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지 않기를. 회색빛 재가 되어 내 안에 잠든 감정들이 그들을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도 말없이 이 자리에 앉아 그들의 밤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 소망한다. 내게 버려진 모든 것들이 결국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내 위에 쌓인 잿더미가 누군가의 고된 하루를 끝맺는 침묵의 증거가 될지라도, 그 안에서 작은 평화나 새로운 시작의 실마리를 찾기를 바란다. 나는 여기, 늘 같은 자리에서, 당신의 깊은 한숨이 옅은 숨결로 바뀌는 순간을 기다린다. 나의 존재가 당신의 밤에 아주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