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 you later
이별은 늘 갑작스럽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사람, 익숙한 인사말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마음 한편을 툭 건드린다.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브라이언을 만났다. 그는 내 하우스메이트였고, 낯선 나라에서 가장 익숙한 얼굴이었다. 같은 집에서 생활하며 함께 웃고, 서로가 요리한 음식과 맥주를 함께 마시기도 했다. 학교 선생님이 숙제라도 내주면 집에 돌아와 브라이언에게 SOS를 요청해서 숙제를 한 적도 있었다. 그는 내 영어 선생님이자 조용한 서포터였고 낯선 땅에서 내 일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아주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가 떠나는 날, 내 마음은 예상치 못한 온도로 흔들렸다. 우간다로 떠난다는 그의 말에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그 순간부터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정든 사람을 보내는 일이 얼마나 깊은 감정을 남기는지 그에게 닿을 수는 없었지만 말하지 못한 말들을 적어보기로 했다.
To.브라이언
안녕. 브라이언. 학교에서 월요일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금요일마다 정든 사람들과 헤어져. 만남과 이별에 너무 익숙해져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고 무덤덤하게 느껴지는 일상의 일부분이 되어버렸어.
그런데 너와의 이별은 마음이 아프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어. 떠난다고 말한 건 내가 먼저인데, 네가 먼저 떠나가네. 떠나는 것은 늘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어. 회사, 집, 여행 등 손을 흔들며 날 배웅해 줄 사람이 있었기에 남겨지는 것이 어색해서 그런 걸까? 너를 내일부터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뻥하고 뚫린 기분이야.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아주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잖아. 어쩌면 나는 나 스스로가 만든 이방인의 덫에 날 가둬두고 숨바꼭질을 하고 살았는지도 몰라. 너희들은 모두 Irish이고 나 혼자 한국인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과 어울리기에는 초라하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고 가끔은 너희들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함과 불편함이 공존했던 것도 사실이다. 가끔은 방값과 빌을 좀 아껴보고자 이사를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 그런 나였기 때문에 너희들과의 헤어짐은 시원 섭섭하면서 일상의 일부분처럼 자연스럽고 무덤덤할 줄 알았는데.. 네가 떠나기 전 안아주면서 작별인사를 할 때 가슴이 철렁하고 떨어졌고 심장이 너무 뜨거워져 화상을 입을 것 같았지 뭐야.
학교 가기 전, 주방에서 네가 말했지?
"아란, 아마 네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없을 것 같아. 고마워. 잘 있어. See you late.r"
"브라이언,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내내 너의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 왜 못해준 것만 생각이 날까? 후회는 밀물처럼 밀려왔다. 학교가 끝나고 터덜터덜 집에 돌아왔을 때 모퉁이를 도는 순간 네 차가 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걸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대문을 열고 네가 있는 주방으로 갔지. 내가 '아직 여기 있네'라고 말하자 네가 10분 후에 떠날 거라고 했어. 그 말 한마디에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빛의 속도로 썼어. 말도 안 되는 문법, 엉터리 영어편지. 하고 싶은 말은 1/100도 못 했지만 그래도 그걸 너에게 전달하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어.
난 편지를 주고 넌 내게 고추장, 겨자, 간장, 시리얼, 액젓까지 선물로 주었지. 정말 너에겐 많은 걸 받았어.고마워. 이제 진짜 집을 떠나야 할 시간이 왔어. 너는 거실, 부엌을 한번 더 둘러보며 5년 동안의 추억과 사람들을 회상하는 듯 보였어. 그런 너를 보면서 나도 눈물이 핑 돌았어. 눈에 눈물이 고인 너는 눈물이 흐르기 전에 쓸쓸히 정든 집을 뒤로하고 떠나야만 했다.
5년 동안 살면서 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떠나보내야 했을까? 그리고 마침내 너도 정든 집을 떠나는 심정은 어떨까 궁금해. 누군가를 배웅한 다는 것, 남겨진다는 것이 이렇게 슬픈 일인 줄 전에는 몰랐거든.
편지를 주고 다시 한번 작별의 포옹을 하면서 우리는 Good bye가 아니라 See you later로 인사를 했지.
내가 외출하거나, 방에 올라가면 네가 늘 했던 말. See you later. 마지막으로 대문 앞에서 차에 타는 너를 배웅했어. 시동을 거는 너를 계속 바라보며 차가 마을을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었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거든.
네가 그립거나 보고 싶을 거란 말도 못 하고 편지에 쓰지도 못했어.
처음엔 후회가 되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잘한 것 같아.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만약 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면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잖아.
네가 떠난 뒤, 너의 방문을 열었을 때 락스와 세제 냄새가 코끝을 찔렀어. 지런히 놓여 있었지. 다음에 이 방을 쓰게 될 사람을 위해 깔끔하게 청소까지 해놨구나. 그리고 책상 위엔 방 열쇠와 집 열쇠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 아직도 책상 위의 열쇠 두 개가 눈에 잊히지 않아. 텅 빈 방 안에서 그 작은 열쇠들이 너의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졌거든. 마치 너의 뒷모습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처럼 조용하고 쓸쓸하게 느껴졌지.
5년 동안 동고 동락했던 너의 열쇠 꾸러미들도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겠는걸? 네가 떠난 지 6시간이 흐르고 새벽 1시가 지나고 있어. 원래 자야 할 시간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네
브라이언. 그거 알? 친구들이 착하고 정 많은 아이리시 하우스 메이과 함께 산다고 친구들이 날 부러워했어.
내가 영어를 조금 더 잘했더라면 너희들과 더 깊이 이야기 나누고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해. 네가 돌아오고 우리가 다시 만날 그 날에는 지금 보다 더 훨씬 더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할게.
넌 내가 만났던 Irish, 아니 모든 외국인들 중에서 최고의 친구였어.
처음에는 한국 음식 만들어 먹는 네가 참 신기하고 좋았는데 이젠 그런 모습들을 넘어서 너란 사람 자체로 참 좋아. 멕시코 음식 만들어 준 것도, 파스타 요리해 준 것도 다 맛있었어. 그리고 월드컵 때 한국 응원해 줘서 고마워. 영어 할 때 자신감 갖고 말하라고 조언해 준 것도 스페인 가는 걸 잘한 선택이라고 격려해 준 것도 고마워. 가끔은 아빠처럼 이것저것 세심하게 챙겨주는 네가 정말 너무 고마웠어. 내 와인 잔이 비어 있었을 때 혹시 내가 뻘쭘해할까 봐 네 잔에 있는 와인을 단숨에 비워내고 조심스럽게 내 잔에 따라주던 너의 배려. 그 작은 행동 하나에도 참 고마웠어.
학교에서 배우기 전에 네가 먼저 알려준 What’s the craic? 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이래저래 너란 존재 자체가 내게 큰 의지가 되었던 것 같아. 그래서 한국에 가서도 절대 잊을 수 없을 거야. 이게 너에게 가장 해주고 싶었던 말이야. 그동안 잘해줘서 정말 고맙고 내가 못해준 거 너무 미안해.
마음 한편에 후회가 남아. 이건 나의 몫이겠지?
네가 한국어를 잘해서 내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영어를 잘해서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말 안 해도 알지?
참 행복했어. 못난 내가 너희와 함께 살았던 것도 큰 행운이었고.
그리고 또 행운인 것은 내가 너희와 이 집에서 함께 살았던 마지막 사람이라는 것.
See you later!
안녕 나의 친구 브라이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