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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Jul 03. 2024

첫걸음마

비움의 미학을 알려준 사비에 

  "댕~ 댕~ " 교회 종소리가 망가진 시계를 대신하여 땡그렁하고 울리더니 나를 깨웠다. 아직 단잠에 빠져있는 몇몇 순례자분들이 깨지 않도록 살그머니 짐을 챙겨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다. 세상은 짙은 어둠이었지만 서광이 비쳐오기도 전에 많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를 향한 긴 여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설렘 가득한 산티아고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첫걸음마.

새벽 어스름이 걷히고 빨갛게 물든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멀리 보이는 두 산등성이 사이로 태양이 기지개를 켜는 듯 한줄기 햇빛이 구름 사이로 치었다. '실버라이닝' 아름다운 하늘과 차가운 새벽공기는 새벽에 걷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부엔 까미노"


 처음이라 어색했지만 길 위에서 만난 순례자들을 볼 때마다 인사를 건넸고 환한 미소와 함께 메아리가 되어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길 위에서는 국적, 이름, 나이, 직업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고,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걸어간다는 것이 중요했다.


30분 정도 걸었을까? 뒤에서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어제 만난 사비에 아저씨가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사비에 아저씨. "

"좋은 아침! 산티아고 첫날인데 잠은 잘 잤어?"

"네.. 제가 이 길을 걷고 있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고 정말 꿈만 같아요. "


 산티아고 첫날 사비에 아저씨와 피레네 산맥 끝자락에 있는 마을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함께 걷기로 했다. 처음에는 걷기가 괜찮았었는데 산등성이를 따라 2시간 정도 걷다 보니 속도는 붙지 않았다.


 앞에서 가던 사비에가 뒤를 돌아보더니 잠시 쉬어가자고 해서 Bar에 들어갔다. 나는 오렌지주스, 사비에는 카페콘레체를 주문했다.


"아란, 가방을 최대한 가볍게 해야 돼. 이것도 필요할 것 같아서 넣고, 저것도 필요할 것 같아서 넣다 보면 가방의 무게 때문에 우리는 걸을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을 거야."


"네."


'헥헥' 고르지 못한 숨을 고르느라 힘겹게 싸움중이었던 나는 시무룩하게 대답하며 오렌지주스를 단숨에 들이켰다. 주스를 다 마시고 유리컵에 있던 각얼음을 하나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먹으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 때 갑자기 머리에서 어제 사비에가 했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비에 아저씨, 어제 말씀하신 '비움'이라는 게 혹시 방금 하신 말씀과 연관이 있는건가요?"


"응. 나는 산티아고 길은 삶, 가방의 무게는 인간의 욕심이자 인생의 욕심이라고 생각해. 욕심이 많은 것도 성장하는 데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지. 하지만 욕심이 지나치게 되면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을 겪게 될 거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을 거야. 그래서 포기하고 비우는 연습이 필요한 거지."  


그때서야 전날 사비에가 말한 '비움'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15분 정도 쉬었을까? 우리는 배낭을 메고 다시 길을 나서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설 채비를 하는 사비에를 붙잡았다.


"사비에 아저씨, 잠시만요. 아저씨 말을 들으니 가방 정리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1분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사비에 아저씨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커다란 배낭 제일 아래쪽에 있는 분홍색 삼선 슬리퍼를 BAR 내부 후미진 한편에 자리 잡은 '기부하는 곳'에 놓고 왔다.


 "아저씨, 어제 말씀하신 아저씨의 '비움'에 대해 정확히는 아니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은 버리는 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없어도 되는 것'부터 차근차근 버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티아고..그리고 제 인생을 걷고 싶어요."


 사비에 아저씨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고 우리는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가방만큼이나 마음이 가벼워졌다.  

 

 비에의 히치하이킹 여행 이야기를 들으며 하하 호호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다음 마을을 향해 걸었다. 그는 컨디션이 굉장히 좋아 보였고 쉬자고 할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은 처음이 의미가 있듯이 나의 산티아고 첫 번째 길 동무 사비에와 함께 산티아고까지 걷고 싶었다. 그래서 사비에의 속도에 맞춰서 계속 걸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사비에와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졌고 나는 더 이상 숨이 차서 그의 속도에 맞춰 걸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어디쯤 왔나 뒤돌아보던 사비에도 자신의 길을 향해 묵묵히 앞만 보며 걸어갔다.


 숨이 턱 끝에 닿을만큼 지쳐 한걸음 내딛기 힘겨워 길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사비에가 저 멀리 희미한 점이 되어갈 때쯤 깨달았다. 단거리 경주야 내 가랑이가 찢어지든, 다리가 부서지든 따라갈 수 있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은 장거리 여정이기 때문에 나만의 페이스를 조절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속도에 맞추면 안 된다는 것을.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속도에 맞춰서 살아간다면 스스로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나를 찾기 위해 떠난 긴 여정. 타인의 속도가 아닌 나의 속도로 걷기로 했다.


삼선슬리퍼에 이어 또 하나 버릴게 생겼다. 눈치. 

굿바이 사비에 

새벽 하늘
첫 길동무 프랑스 사비에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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