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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Jun 28. 2024

타인의 카미노

당신은 어떤 길을 걷고 있나요?

리벨과 쟈넷은 엄청난 섭외력을 발휘하며 브라질 출신 알렉산드로까지 영입했다. 우리 네 사람은 팜플로나 터미널에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탔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하비에르바르뎀을 닮은 택시 기사님이 커다란 배낭 4개를 트렁크 실어 주셨다.


  조수석에는 알렉산드로가,  마리벨, 쟈넷과 나는 뒷자석에 옹기종기 앉았다. 택시 안 라디오에서는 콜롬비아 출신 세계적인 가수 샤키라의 'hips don't li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브라질 출신 흥부자 알렉산드로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두 손을 위로 올리며 춤을 췄고, 쟈넷과 마리벨은 택시기사님과 대화를 나누고, 나는 창문밖 스페인 풍경을 감상했다.


 

 신나는 노래와 함께 택시는 달리고 달려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마을인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다시 아일랜드 골웨이에 온 듯, 초록색 푸른 초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7월 말이었지만 피레네산맥 끝에 자리한 산골마을에는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알렉산드로, 쟈넷과 마리벨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식당으로 갔고 나는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을 발급받기 위하여 순례자 사무실로 갔다. (*크레덴시알: 순례자임을 나타내는 신분증으로 숙소를 이용하거나 순례자증명서를 발급받을 때 꼭 필요하다. )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순례자를 상징하는 가리비 껍데기 개를 사고 크레덴시알을 발급받기 위한 줄을 섰다. 크레덴시알을 발급받고 사무실 밖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쁨이 가득 담겨있었다. 얼굴에 번지는 그들의 환한 미소를 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런던 공항에서부터 쌓인 피로가 한 에 풀리는 순간이었다. 10분 정도 기다린 끝에 내 차례가 되었다. 내 앞에 있는 곱슬머리에 빨간 뿔테 안경을 쓴 키 큰 남자직원에게 "HOLA!" 하며 여권을 건넸다.  


 빨리 크레덴시알을 발급받고 순례자들의 기쁨과 설렘에 동참하고 싶었는데 는 세월아 네월아 하고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자꾸 내 뒤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나도 흠칫하여 뒤를 돌아봤지만 내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내 질문에 당황한 그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키처럼 다란 손을 양 옆으로 휘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아니요.. 죄송해요.. 혹시 일행이 있나 해서요.. "

"아니요. 저 혼자예요. "

"그렇군요. 저도 5년 전 산티아고 도보순례를 다녀왔어요. 순례를 마친 다음 해부터 여기서 종종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요. 도보순례를 하는 한국 사람들은 많이 봤는데 혼자 온 한국 여자는 처음 봐서 일행이 있는지를 확인했어요.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얼굴에 붙은 곱슬머리 한가닥을 귀 뒤로 넘겼다.


"아.. 정말요? 다들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하하. "


  쑥스럽긴 했지만 내심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 머리를 긁적이며 싱글거렸다. 그는 내 미소에 화답이라도 하듯 벙글거리며 크레덴시알에 첫 번째 도장을 쾅! 찍어주며 "부엔카미노" 하고 인사를 건넸다.


 '첫 도장을 받았다.' 두근거리는 마음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순례자 사무실을 나와 식당으로 갔다. 노란색 파라솔이 있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안으로 들어가 메뉴를 확인하고 햄치즈 파니니와 맥주를 주문했다.


  목이 따끔거릴 때까지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키며 카미노 시작을 알리는 혼자만의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 파니니를 안주 삼아 한입 베어물었다. 순간, 순례자들은 조가비 뒷면에 무언가를 적는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사무실에서 산 조가비와 펜을 가방에서 꺼냈다.


 '이름을 쓸까? 날짜를 쓸까?' 생각하다가 '지금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적기로 했다.  참을 고민한 끝에 길을 통해 여유를 찾고 자신을 돌아볼아보라는 의미로 "Enjoy Yourself" 라고 적었다.



 성격이 급하고 무엇이든 불안해하는 습관으로 '오늘' 을 온전히 즐기지도, '내일'을 온전히 준비하지도 못했다. 나의 매일은 항상 오늘과 내일 그 어딘가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뒤처지고 싶지 않아서, 좋은 딸은 아니지만 챙피한 딸이 되고 싶지 않아서' 아무도 나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눈치를 보며 선택했던 하루하루가 마음을 잡지 못하고 애매하게 방황하는 나를 만든 것 같았다.  

 

 조가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2명의 순례자가 같이 앉아도 되냐고 물어봤다. 그들은 오늘 생장피드포르에서 순례를 시작하여 막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한 독일 출신 프랑크와 프랑스출신 사비에였다.


 프랑크와 사비에는 맥주와 그린 올리브를 주문했고, 맥주가 나온 후 우리는 서로의 잔을 부딪혔다. 사비에 아저씨는 단숨에 맥주를 들이킨 후 맥주잔을 내려놓고 짭쪼올리브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려고 하나요?"


 갑자기 훅치고 들어온 아저씨의 질문에 머리가 잠시 하얘졌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가방에 달아 둔 조가비를 사비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몇 년 전 <연금술사>를 읽었어요. 작가 파울로코엘료는 원래 작가가 아니었는데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작가가 되었고 인생이 바뀌었대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저에게도  파울로코엘료처럼 인생이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으면 하는 기대로 여기에 왔어요. 저에게도 기적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안그래요?? 아저씨는요?"


 사비에아저씨는 마음을 비우기 위하여 걷는다고 했다.


'채우기도 모자른데 뭘 비우다는거지?'

아저씨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삶의 목표가 돈이 되는 요즘 세상. 사람들은 경쟁만 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잊어버린 것 같아.  삶은 경쟁이 아니며 경쟁을 해야 한다면 오직 자기 자신과 경쟁을 해야 하는 거지. 현재를 즐기며 주어진 것에 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해."

아저씨의 말은 나를 숙연하게 했고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숙연한 분위기에 목만 타들어갔고 맥주만 벌컥벌컥 마셨다. 맥주를 한잔씩 더하고 우리는 알베르게(*순례자를 위한 호스텔) 로 들어갔다.

 아저씨가 말씀하신 '비움' 이라는 단어가 자꾸 귓속에 맴돌았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는 수도원을 개조한 알베르게로 이층 침대가 60개, 최대 120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2010년 기준) 숙소는 남자, 여자, 공용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있었다.


 침대를 배정 받고  '순례자를 위한 미사' 를 드리기 위해 성당으로 갔다. 성당 입구에서는 한명의 한국인을 만났고 더할나위없이 반가웠다. 같이 미사를 드리는데 신부님께서 순례자들을 축복을 빌어주셨다.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미사다 보니 "부엔카미노(Buen Camino)" 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같은 길을 함께 걷는 순례자들의 응원과 신부님의 축복 속에 경건한 마음으로 순례를 시작할 수 있을것 같았다.


미사를 마치고 알베르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옆에 올려둔 시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강박증과 조급증을 없애라'는 첫번째 지령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2010년)
순례자여권인 크레덴시알
순례자 상징 가리비 껍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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