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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Jun 21. 2024

프롤로그: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브라이언과 세레나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Be the reds' 티셔츠를 입고 붉은 물결을 만들었던 2002년 6월. 붉은 물결과 함께 늦은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6차 교육과정 마지막 학년. 예체능반을 제외한 학생들은 열외 없이 밤 10시까지 자율학습을 해야 했던 학창 시절. '목표 없는 공부가 의미가 있을까?' 목적 없이 표류하는 배처럼 느껴졌던 나는 예체능반은 아니었지만 담임선생님께 자율학습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 저는 자율학습을 하지 않겠습니다."

"대학을 가려면 야자를 해야 하지 않겠어?"

"저는 하고 싶은 게 없어요. 그래서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는 더더욱 모르게 모르겠어요. 또 아침 7시 30분에 와서 밤 10시까지 학교에 있는다는 사실이 너무 숨이 막혀요."

"다들 그렇게 살아. 나도 그랬고."

"전 학교에 강제로 남아있는다고 해서 공부를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왜 이렇게 유난이야? 쯧쯧.. 넌 회사 생활하기엔 글러 먹었다. 평생 자영업이나 해."


 평생 자영업이나 하라는 덕담과 함께 유난을 떨며 3년간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눈만 꿈뻑꿈뻑거리거나 TV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싶어 채널을 여기저기 돌려도 축구 중계밖에 하지 않았던 2002년 6월. 우연히 보게 된 아일랜드 vs스페인 16강전이 내 인생의 큰 영향을 미칠 줄은 이때는 알지 못했다. 승부차기까지 간 대접전 끝에 스페인 국가대표 골키퍼 카시야스의 선방으로 스페인이 8강에 진출하고 아일랜드는 아쉽게도 패배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환호하는 스페인 선수들보다 고개를 떨구며 망부석처럼 경기장에 서 있었는 아일랜드 선수들에게 눈이 먼저 갔다. 당시 아일랜드 국가대표 축구 감독  '마이클매카시'가 더그아웃에서 뛰어나와 좌절하고 눈물을 보이는 선수들에게 다가가 한 명 한 명 안아주고 웃으면서 위로해 주었는데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이역만리 아일랜드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나에게도 꿈이 생긴 순간이었다.


 '우리 인생을 결정짓는 건 커다란 사건이 아니라 아주 작은 사소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글귀처럼 사소한 순간이 나의 인생을 결정짓는 순간이었다.


2009년 가을. 사무실

"팀장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

"음... 아란 씨, 올해 몇이지? 스물셋인가?? 전문대 졸업하고 스물세 살이면 적은 나이는 아니야. 사회생활이 처음이라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적응될 거야.  요즘 취업난도 심한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 "

"팀장님, 저는 아일랜드에 가고 싶어요. 지금이 아니면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뇌보다 입이 먼저 반응하여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인문계 고등학교 나와서 대학은 가야 하지 않겠니?'라는 주변의 시선을 감내하지 못하고 수능점수에 맞춰 경기도에 있는 전문대 '경영과'를 졸업했다. 어리바리 대학에 입학하여 대학생활에 적응하고 진로에 대해 생각하려고 할 때쯤 졸업생의 신분이 되어있었다. '인문계=대학'이란 공식처럼,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이라는 공식을 삶에 대입시켜 대기업 정규직 공채로 입사했다. 흐르는 강물에 정처 없이 떠밀려가는 흐물거리는 종이배 같은 나의 삶이여.  


입사한 지 1년. 정년이 보장된 직장과 많지는 않지만 꼬박꼬박 통장에 꽂히는 월급을 받는 평범한 안정적인 직장 생활. 적성에 맞는지 아닌지를 파악하는데 1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최고의 다이어트는 역시 마음고생이라고 했던가. 1년간 깊은 잠이 들지 못하고 새벽에 3~4번씩 깨는 건 기본이고, 한 달간 체중이 4킬로가 빠졌다. 어느 날, 걸어 다니는 좀비처럼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두통도 심해 연차를 내고 한의원에 갔다.


한의원 원장님께서 맥을 짚으시고 갸웃거리시면서 오른 손목에 다시 맥을 짚으셨다. '맥이 상당히 약한데요? 맥이 약해 피로나 권태를 빨리 느낄 수 있어요.' 기초 체온도 낮고 순환도 잘 안 되는 편이라 몸에서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하고 내보내기 때문에 몸에 힘이 없고 체중이 빠지는 거라고 하셨다.


 보기에는 잘 닦여진 탄탄대로를 걷는 것처럼 보였지만, 건강까지 해치면서 재미도, 비전도 없는 일을 안정적이다는 이유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평범하면서도 이상적인 삶이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취업해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아닐까? '꿈'은 원래 이룰 없기 때문에 '꿈'인 거니까  찾거나 이루기 위해 애먼 고생하지 말고 현재하고 싶은 일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현명하게 살아가는 법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유난 떨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하면서 감사하고 욕심부리지 않고 현재만족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안정적인 생활보다 일말의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성취감이라고 생각했고 입사 1년 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응원해 주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부모님의 한숨소리와 이지러진 얼굴은 기본이었고, 회사 선배들도 '퇴사하면 이만한 회사 찾기는 힘들 거야. 아니 다시는 없을걸?' 하며 설득했다. 몇몇 친구들은 '부럽다, 근데 돌아와서 뭐 할 거야?' 응원을 가장한 아낌없는 시기를 보냈다. 시기와 질투, 응원 속에 나는 더블린행 비행기에 올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는 지금 난기류를 통과하는 거라고 생각해. 흔들리는 비행기처럼 나는 잠시 흔들리겠지만.. 멋지게 내 꿈에 착륙할 수 있을 거야.'


 새로운 환경인 아일랜드에서 이방인이 되어 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2010년 6월, 아일랜드 골웨이

'타닥타닥.. 쏴아 쏴아... '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 위에 한 방울, 두 방울.. 물방울무늬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세차게 내렸다.  헐레벌떡 마당으로 뛰어나가 빨래를 걷으며 속으로 생각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아일랜드 날씨는 모르는 법. 이 놈의 날씨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날씨 덕분에 내 기분도 열두 번씩 오락가락한다. 아일랜드 날씨가 변덕스럽다는 걸 모르고 온 건 아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오락가락하는 아일랜드날씨 덕분에  빨래가 다시 빨래가 되었고 비에 젖은 빨래를 건조기에 넣고 냉장고에서  "바바리아"  캔맥주 하나를 꺼내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스티븐이 내준 쓰기 숙제를 하려고 했지만, 어쩐지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다.

유튜브에서 하림의 '아일랜드에서'를 들으며 퇴사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무얼 찾아 떠나 온 걸까..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오 끊임없는  날개 짓으로 멀리 돌아왔구나.'




밀린 청소를 하고 거실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상당한 권태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희망과 호기심으로 부풀었던 유학생활. 모든 것이 신기했던 처음과 달리, 영어공부, 집안일, 장보기, 도시락 싸기 등 골웨이 어학연수 생활도 일상이 되어버렸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10개월 후 한국에 돌아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미래를 걱정하며 심장에 노크하는 소리로 들렸다. 한국에 돌아가서 뭘 해야 하나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현재가 아닌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 현재에 올인하지 못하고 다시 걱정하며 회사에 들어갈 생각, 스펙을 쌓을 생각, 포장지를 벗기고 '나'라는 선물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어떻게 다시 예쁘게 나를 포장할 포장지를 고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걱정도 주인을 닮아 조급증이 심하구나.

권태로움을 이기는 방법, 나를 위로하는 건 역시 맥주밖에 없다.  

babaria 한 캔을 다 마셔갈 때쯤..   딸깍 딸깍. 브라이언이 비에 맞은 생쥐꼴을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현관 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브라이언을 보자마자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  차를 끓이기로 했다. 포트에 물을 받아 인덕션에 올려놓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마시던 맥주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캔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고 냉장고에서 다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하고 내 앞에 앉은 브라이언이 나를 보고 묻는다. "what's the craic?"

"브라이언, 나는 앞으로 뭘 해 먹고살아야 할까?"

항상 밝은 얼굴로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집주인이자 비공식 영어선생님 '브라이언'. 왕왕 밥도 같이 먹으며 영어도 공부하고, 내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사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비도 오고 갑자기 센티해졌나 봐. 문득, 내가 여기 온 게 잘한 결정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영어를 1년 동안 배운다고 해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질까?" 마른하늘에 세차게 비가 퍼붓는 빗방울처럼 나의 가슴에도 부정적인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고, 부정적인 감정의 먹구름이 머리 위로 드리운 것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 '연금술사' 읽어봤어? 그 책을 쓴 파울로코엘료 작가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를 걷고 인생이 달라졌대. 원래 작가가 아니었는데 직업도 바뀌고 이제 세계적인 작가가 된 거지. 그 책이 나를 골웨이로 오게끔 만들었는데 다시 원점이 된 것 같아."

"............." 브라이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knock, knock, 브라이언 듣고 있니? , "왜 아무 말이 없어?"

나는 찬장에서 베르시티 홍차 티백을 하나 꺼내 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따랐다. 트레이에 홍차와 우유를 브라이언에게 건네며 말했다.

"너도 거기를 가." 브라이언은 곰곰이 생각하면서 설탕을 하나 컵에 넣으며 무심하게 툭 던졌다.

"그 작가가 인생이 바뀌었다고 한 스페인 순례자의 길, 너도 한번 걸어보는 건 어때? 기적이 그 작가한테만 일어나라는 법도 없고, 너한테도 일어날 수 있잖아. 앉아서 푸념만 하는 것보다 뭐라도 해보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어학원 방학도 된다며? 계속 얼빠진 상태로 공부를 하는 것보다 스페인 갔다 와서 영어공부를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

 티스푼으로 차를 젓고 한 모금 마시며 그는  천천히 말했다.

" Here goes Nothing. "

그의 말이 맞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순한 걸 또 너무 어렵게 생각해 버렸구나.


따스한 한줄기 미풍이 불어오는 골웨이의 어느 날.

아일랜드 어학연수가 나의 인생 2 회차라고 생각했다. 2회 차에는 인생의 갈피가 잡힐 줄 알았는데 마음과 생각이 또 엉켜버린 것 같다.  브라이언이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말이 있듯이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행동이 중요하다.  파울로코엘료처럼 인생이 극적으로 변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경험을 통해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막상 마음의 결정을 하니 하나 둘 착착 진행되는 것 같았다.

아일랜드- 스페인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한국에 있는 가족의 도움을 받아 침낭, 운동화, 배낭을 소포로 받았다.

원장선생님은 처음에는 만류했지만 나의 계획을 듣더니 깊은 포옹으로 응원을 해주셨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도착하니 반가운 손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란"

"세레나. ~~~~~!!  어떻게 지내? 댄은 잘 있어?" 세레나는 같이 살았었는데 한 달 전 남자친구 있는 리머릭으로 이사를 갔다. 한 달 만에 보는 세레나가 너무 반가웠다.

"아란, 스페인 도보순례 간다며? 얼마 전에 브라이언이 말해줬어. " 세레나가 브라이언에게 손짓하며 브라이언을 쳐다보니, 브라이언은 어깨를 으쓱하며 오븐에서 스콘을 꺼내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고 세레나는 말을 이어갔다.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카미노데산티아고'완주인데,  네가 간다고 하니 내심 부럽기도 하고 설레더라고. 회사 동료도 카미노에 다녀왔는데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면서 엄청 추천해 주더라고. 내가 너 얘기를 하니 산티아고 걸을 때 필요한 걸 알려줬어."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세레나가 스콘을 한입 베어 물며 광고지 뒷면에 친구가 조언해 준 '산티아고 머스트해브 아이템'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등산양말, 빨래집게, 바셀린, 밴드, 침낭, 구급약..

나에게 광고지를 건네고 그녀는 가방에서 구급약 두 개를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근데 세레나. 혹시...  이거 때문에 리머릭에서 골웨이까지 온 거야?"   브라이언은 옆에서 웃고, 세레나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란, 나도 그 길을 경험해보지는 않아서 힘들지, 즐거울지.. 가늠할 수는 없어. 그냥,  지구 반바퀴를 돌아 골웨이에 온 것도 너에겐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하니 와서 직접 응원해주고 싶었어. 그리고 친구가 이 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어.


"산티아고에서 길을 잃더라도 노란 화살표나 조가비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줄 거니 걱정하지 마.  우리 인생도 산티아고와 비슷해. 우리가 노력만 한다면 우리 삶에도 노란색 화살표와 조가비가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줄 거야. 너의 오늘을, 나의 오늘을 응원해. "


정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턱 막혔다. 영어를 못해서 말문이 막히기도 해서 세레나와 깊은 포옹을 했다.

구름이 드리웠던 연수생활이 환한 세레나의 미소가, 단순하면서 중요한 이치를 깨닫게 해 준 브라이언의 조언이 구름 뒤의 햇살 '실버라이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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