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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Jul 08. 2024

카미노 매직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법 같은 순간

 구름 한 점 없고,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날씨. 탁 트인 하늘 아래 밀밭이 길 양옆으로 광활하게 펼쳐져있었다. 산티아고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마와 콧잔등에 맺힌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배낭에 어깨가 쓸렸는지 빨갛게 되어 살갗이 하얗게 벗겨지고 따가웠다. 체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이런 폭염에 무너지다니 괜스레 자존심이 상했다.


  무거운 배낭도 체력소모에 한몫한 듯했다. 슬리퍼를 버렸지만 아직 배낭이 무거웠다. '얼마나 더 버리고 비워야 편해질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잠시 앉아서 쉬고 싶었지만 그늘은커녕 나무 한그루 찾아보기 힘들었고 카페도 한참을 가야 나올 것만 같았다. 배가 고팠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길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쪼그려 앉았다. 가방에 머리를 박고 한 손을 깊숙이 넣어 전날 산 치즈를 뒤적대며 찾는데 누군가 내 등을 톡톡 쳤다. 뒤돌아보니 머리를 옆으로 곱게 땋은 순례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도와줄까요?"


괜찮다는 대답 대신 한참 다듬거리며 찾던 슬라이스치즈를 그녀에게 보여주며 미소 지었다.


"사실 오늘 오렌지주스 한 잔밖에 못 먹었어요. 카페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저 산을 보니 도저히 걸을 힘이 나지 않더라고요. "


나는 쪼그려 앉은 채로 밀밭 뒤에 있는 높은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 치즈도 찾았고 이거 먹고 힘내서 걸을 수 있어요." 치즈를 흔들며 덤덤하게 웃으면서 말했지만 턱을 타고 내리는 땀방울과 지친 표정은 숨길 수 없었나 보다.


 그녀는 내 마음을 읽은 것이었을까?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내가 치즈 찾았을 때처럼 뭔가를 뒤적거리며 찾기 시작했다.


"여기 있다. " 그녀는 미소 지으며 초콜릿 빵 하를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괜찮다고 사양하고 싶었지만 염치라고는 없는 두 손이 덥석 받아버렸다. 


"감사합니다. 저는 드릴게 아무것도 없는데.. "

"이 길 위에서는 모두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해요. 무조건적인 도움만 받는 사람도, 주기만 하는 사람도 없어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처럼요.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났고 당신이 누군지 잘 몰라요. 하지만 당신이 이 길을 걷고 있는 도움이 필요한 순례자에게 호의와 친절을 베풀 거라는 건 확신할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카미노매직이에요."

그녀는 일어나 가방을 챙겨 "부엔까미노" 하며 흙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떠났다.


 앉아서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몇 초간 바라보았다.

세상은 혼자서 살 수 없고 서로의 도움과 관심을 필요로 한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호의와 친절' 선빵을 날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떠나고 빵을 손으로 뭉떵 잘라 치즈를 넣어 입에 물고 배낭을 다시 등에 짊어지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건넨 달콤한 마음과 초콜릿빵 덕분에 전보다 무릎에 힘이 주어 걸을 수 있었다.


 팜플로나에 도착할 때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절뚝거리며 걷는 스페인 순례자 아저씨를 만났다. 처음에는 나처럼 준비 없이 온 순례자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린 시절 왼쪽 다리를 다쳤다고 하셨다. 아저씨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으시면서도 '산티아고 완주'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나는 보다시피 왼쪽 다리가 불편해서 오래 걷지를 못해. 어디까지 걸을 수 있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죽기 전에 산티아고 순례를 꼭 완주하고 싶어. 올해가 안되면, 내년에, 내년도 안되면 내 후년이라도.. "

"아저씨, 정말 멋져요. 제가 아저씨였다면 도전할 생각조차 못했을 거예요. "


아저씨는 부끄러운 듯 빙그레 미소 지으셨다. 아저씨 얼굴을 보는 순간, 빌바오행 비행기에서 만난 헤수스 할아버지의  씁쓸한 눈빛이 생각났다. 같은 꿈을 꾸더라도, 꿈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랐다. 나는 포기하는 편일까? 도전하는 편일까?


  아저씨는 스페인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강했다. 카스티야, 카탈란, 바스크, 문화, 음식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덕분에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마음의 고향이 팜플로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실제로 헤밍웨이는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집필했고 오랫동안 머물며 여러 작품을 썼다고 한다.


 친절한 아저씨는 팜플로나에 투우경기장, 시청, 대성당을 관광시켜 주셨다. 산을 하나 넘어온 탓에 지칠 대로 지쳐 쉬고 싶었지만 아저씨가 실망하실까 봐 "우와~우와" 하며 리액션을 했다. 아저씨도 힘에 부치셨는지 '팜플로나 알베르게'에 나를 데려다주시고 버스를 타고 다음 마을로 이동하셨다.


 길 위에 펼쳐진 마법은 스페인의 태양보다 더 강렬하고 따뜻했다.

  

매슬로우의 말은 맞았다.
그녀가 선물해준 빵, 스페인순례자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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