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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Jul 17. 2024

용서의 언덕, 페르돈(Perdon)

마이캡틴 장캡틴

 새로운 시작을 할 때 '잘 될 거야'라는 자기 믿음보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며 불안과 의심을 하는 편이다.

 '이 길을 잘 끝낼 수 있을까?' 스스로를 의심하는 습관은  위에서도 계속되었다.  

전날 만난 한국인 선생님과 동행을 하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혼자 천천히 걷는 건 괜찮은데 '걸음이 느려 혹여 민폐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인생의 무게에 걱정 한 스푼을 더하여 짊어지고 산티아고를 향하여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조금만 걸어도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숨이 찼다. 아스라이 보이는 산 정상에는 돈키호테가 거인이라고 오해했던 풍차가 바람에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 바람이 나에게도 살랑거렸지만 새우처럼 굽어진 등허리에 맺힌 땀을 식혀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길에는 크고 작은 자갈들이 널브러져 있었돌멩이들을 피해 걷는 건 쉽지 않았다.


 자갈밭을 오랫동안 걸어서 그랬을까? 발에 물집이 생겼는지 걸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고 걸음도 엉성해졌다. 쉬어가고 싶었지만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속도를 내어 걸었다. 조금 뒤처지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나는 무엇이 불안한 것일까? 불안도 함께 동행하며 걷다 보니 까마득하게 보이던 풍차도 점점 가까워져 어느새 내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드! 디! 어! 페르돈고개(용서의 언덕)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순례자들의 행렬을 나타내는 판금으로 만든 조형물이 있었다. 잠시 정상에 서서 조형물 뒤로 넓게 펼쳐진 밀밭과 먼 산을 바라보며 자기 불신과 불안으로 가득 찬 나 스스로에게 용서를 구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빵과 치즈를 꺼내 먹고 있는데 한 순례자가 하얀색 봉지를 나에게 툭 던졌다. 가뜩이나 무더운 날씨에 지치고 피곤했는데 옆에 덩그러니 떨어진 봉지가 나의 온 신경을 자극했다. 눈을 흘기며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맺힌 땀을 훔치며 내가 바라봤던 먼 산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일랜드에서도 겪지 않았던 인종차별을 스페인에서 겪는구나.' 생각하고 꽁꽁 묶인 봉지를 열었다. 봉지 안에 쓰레기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빵, 치즈, 바나나, 물이 들어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얼굴은 뜨거운 스페인 햇살 때문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고 여전히 먼 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그가 준 봉지 함께 사과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사과 드실래요?"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건네받은 사과를 크게 베어 아삭거리며 사과를 먹었다. 사과를 먹는 그를 바라보며 내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아란이에요."

"꼬레아? 꼬레아?" 그는 가지런한 치아를 보이며 활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까를로예요. 이탈리아 로마에서 왔어요. 15년 전 해군으로 일할 때 한국이랑 일본에 가본 적 있어요. 반가워요."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페르돈 고개를 힘겹게 올라오는 지친 모습을 보고 도와주고 싶었지만 영어가 서투르기도 하고 부끄러움에 망설였다고 했다. 단지 표현이 서툴렀을 뿐, 첫인상과는 다르게 굉장히 따뜻했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그의 환한 미소를 보며 국적과 나이를 떠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음날, 아침을 먹기 위해 아주 작은 슈퍼마켓 겸 카페에 들렀다.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스페인 남자 3명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NO Spanish"라고 했지만 3명이 나를 뱅그르르 에워싸며 스페인어로 계속 말을 걸었다. 낌새가 이상해 밖으로 나와 슈퍼 앞 파라솔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중 한 명이 나를 따라 나와 내 앞에 서서 계속 말을 걸었다. 이상한 사람을 이상한 스페인어로 웃으면서 상대하고 있었는데 세명의 순례자가 슈퍼맨처럼 등장했다.  팜플로나에서 만난 마리벨과 쟈넷, 전날 만났던 장카를로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들에게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안녕하세요. 컨디션 괜찮나요?"


 내 인사는 사뿐히 즈려 밟혔다. 쟈넷은 그 남자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스페인어로 싸우다시피 말을 했고 마리벨은 장까를로에게 '얘 데리고 먼저 가'라고 말하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커피를 다 마시지도 못하고 얼떨결에 장까를로를 따라나섰다. 그는 걸음이 상당히 빠른 편이지만 이 날은 보디가드라도 되는 듯 옆을 서성이며 내 걸음 속도에 발을 맞춰주었다.


 그 마을을 빠져나와 장까를로가 나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물집 하나가 잡히긴 했지만 괜찮지요. 아저씨는 괜찮아요?" 어떤 의도로 물어본 건지 알고 있었지만 무거운 분위기가 싫어 별일 아닌 듯 웃으며 말했고 그는 정색했다. 대답 없는 그를 보며 멋쩍어 뒤를 돌아봤는데 빨간 두건을 멘 쟈넷과 카우보이 모자를 쓴 마리벨이 나에게 달려왔다.


"치코말로"

"응?"

"나쁜 자식."


 'Chico'는 스페인어로 소년,  Malo는 '나쁜'이란 뜻이다. 한 여름밤의 꿈처럼 지나가는 해프닝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 위험했다고 쟈넷이 설명해 주었고 나는 바보처럼 실실거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치코말로 덕분에 나는 언니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장까를로 아저씨랑도 친구가 된 것 같고요. 고마워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섯 개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위험한 상황이긴 했지만 같은 길을 걷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처럼 나를 걱정해 주는 친구가 생긴 것 같아 행복했다.

돈키호테가 오해했던 거대한 풍차
공포의 페르돈고개
치코말로
첫 번째 카미노 가족 : 장까를로(왼쪽에서 세 번째)
마리벨과 쟈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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