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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Jul 18. 2024

꼬부랑 할머니 지팡이

호의를 받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새벽 4시 30분, 닭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세수를 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오늘도 길을 나선다. 산티아고 길에서 하루 일과는 참으로 단순하다. 일어나 걷고, 먹고, 빨래하고 잠이 든다. 공자의 말처럼 '삶은 아주 단순한데 내가 복잡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욕심과 걱정으로 똘똘 뭉쳐 늘을 살지 못하고 불확실한 내일을 향해 발버둥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이 길이 끝나면 '나만의 노란색 화살표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 한줄기로 오늘도 무릎에 힘을 넣어 걷는다.


 무릎에는 힘이 들어가는데 발바닥에 잡힌 물집이 자꾸 내 걸음을 멈추게 한다. 한국에서 보내주신 등산 스틱을 꺼냈지만 불량인지 땅을 짚을 때마다 자꾸 나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앞으로 고꾸라질뻔했다. 다음 마을에서 버리기로 하고 가방 옆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시 길을 나섰다.


  발바닥에 잡힌 물집이 거슬려 빨리 걸을 수도 없고 중간중간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처음 며칠은 '부엔카미노' 하는 것도 어색했는데 이제는 나를 스쳐가는 모든 순례자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다. 순례자들과 길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여러 번 만난 적도 있는데 나의 레퍼토리는 AI처럼 늘 한결같았다.


"올라. 부에노스띠아스(좋은 아침이에요). 피에 오케이? 암포야? 꼬미다? 부엔까미노. 아스따루에고 (발 괜찮아요? 물집? 식사는? 부엔까미노. 이따 봐요.)"


 나에게 되돌아오는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고 는 사람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Poco a Poco(조금씩 천천히 걸어요)"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해가 중천에 걸려 오후가 되었지만 아침 인사밖에 못하는 바보 같은 나를 위하여 몇몇 사람들은 웃으며 스페인어를 알려주기도 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일지라도 누군가를 미소 짓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배움과 기쁨, 위로가 함께 있는 산티아고다.


  그렇게 천천히 걷고 있는데 나와 비슷한 또래의 순례자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나에게 다가와 영어로 물었다.   


"너는 괜찮니?"

"그럼, 보다시피. 나는 당연히 괜찮지. 너는 어때?"


 먼저 말을 걸고 안부를 묻는 쪽은 나였기 때문에 누군가 나의 안부를 먼저 물어봐준다는 것이 조금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건 여기서도 계속되었다. 걷는 모습과 사뭇 다른 얼토당토않은 나의 대답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푸하하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보다시피??"


걸음이 느리고 물집이 잡힌 게 뭐 그리 대수냐는 표정을 하고 그에게 말했다.


"그럼, 난 괜찮아.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서 그렇지, 천천히 걸으면 괜찮아. 너는 어떤데? 물집은? 밥은 먹었어? "

"나야. 보다시피 괜찮지." 그는 내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고 본인은 아무 문제없다는 듯이 두 팔을 양옆으로 벌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한 손에 쥐고 있던 등산 스틱을 툭 내밀며 말했다.


"내가 볼 때는 너 안 괜찮아 보여. 이거라도 짚고 걸어. 받아."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당황했고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나는 정말 괜찮아. 고작 물집이라고. 그리고 아직 산티아고까지는 많이 남았는데 이걸 나한테 주면 어떡해? 돌려주면 다행이지만 우리가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르잖아. "


"너는 참 말도 많고 걱정도 많다. 걱정하지 마. 단순하게 생각해. 길 위에서는 모두 친구야. 네가 내 발에 잡힌 물집과 점심을 챙기듯 나도 너를 걱정해서 주는 거야. 안돌려줘도 괜찮아."


 그가 건넨 지팡이보다 '길 위에서는 모두 친구'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무조건적인 도움을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없다고 하지만 도움 받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다. 하나를 받으면 두 개로 갚고, 두 개를 받으면 네 개로 갚아야 하는데 만나지 못하면 갚을 수가 없으니까. 지팡이를 받으면 '반드시 돌려주어야겠다' 는 압박감으로 스스로를 옭아맬 것 같았다. 그가 상처받지 않게 호의를 거절할 방법을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유레카! 가방 옆주머니 지팡이가 생각났다. 땅을 짚으면 짚을수록 작아지고 허리까지 아파지는 꼬부랑 할머니 지팡이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걱정해줘서 정말 고마워. 근데 나도 지팡이 있어."


"스틱이 있는데 왜 안쓴거야? 산티아고는 긴 여정이야. 신발도 별로 안좋아보이는데 컨디션을 생각해서 스틱을 쓰는게 어때? "


 그는 한시름 덜었다는 눈빛을 하고 자기 말을 계속 했다.

"그리고 너는 다른 사람 컨디션 챙기기 전에 너 스스로 괜찮은지 먼저 살펴야해. "


 우리는 그때서야 통성명을 하고 잠시 함께 걸었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미국 친구가 말한 것처럼 단순하게 살고 싶었지만 오늘 하루도 복잡하게 만들었다.


새벽 길
날 작아지게 만들었던 지팡이
미국인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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