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마당에는 노을빛 땅거미가 드리워졌다. 거실에서는 기아저씨와 미국 청년이 체스를 두고 있었고, 아일랜드 저널리스트 피터는 돋보기 안경을 쓰고 산티아고에 관한 책을 집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마리와 선생님은 침대에서 휴식을, 나는 널어놓은 빨래를 걷기 위해 마당으로 나왔다.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뽀송뽀송하게 잘 마른 빨래를 다 걷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장까를로가 마당 구석에 앉아 발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빨래를 한 아름 품에 안고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곁눈질로 흘끔거리며 그의 발을 보니 붓기는 심하지는 않았지만 파스를 붙이면 빨리 회복이 될 것 같았다. 장까를로에게 받았던 호의를 갚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딸내미를 위해 엄마가 보내주신 파스가 드디어 빛을 발할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1분만 기다려주세요." 장까를로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갔다. 빨래를 침대 위에 대충 던져놓고 가방에서 물파스와 붙이는 파스 두 개를 꺼내어 마당으로 나와 장까를로에게 말을 건넸다.
"아저씨, 발 좀 보여주실래요?"
예상치 못한 나의 말에 흠칫 놀란 그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멀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이거 엄마가 한국에서 보내준 거예요. 허리나 다리를 삐끗하거나 시큰거릴 때 붙이면 도움이 되더라고요. 아저씨께 여러모로 신세를 진 게 많아 보답하고 싶지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아저씨 발등에 파스를 붙여주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아요." 나는 파스를 장까를로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유럽에는 뿌리는파스만 있고 붙이는 파스는 없어 거부감이 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까를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에 귀를 기울이더니 조심스럽게 발을 내어주었다. 나는무릎을 꿇고 그의 발을 왼쪽 허벅지위에 올려놓은 뒤 하얀 네모난 파스를 한장 꺼냈다. 청량하고 알싸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가 파스 냄새에 대한 거부감과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이미 파스는 그의 발등에 착! 달라붙어있었다.
"아저씨. 진짜 저를 한 번만 믿어주세요."
"냄새가 이상하긴 하지만 오늘 너가 준 선물은 오래도록 기억이 남을 것 같아. " 장까를로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얗고 네모난 파스 한 장이 발등을 넘어 마음까지 치유해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장까를로를 뒤로 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여러 순례자들 사이에서 혼자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글로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오지랖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글로리아, 어디 아파? 어깨 다쳤어?" 글로리아에게 물었다.
"다친건 아닌데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그런가? 근육이 뭉친것 같네."
"괜찮으면 마사지를 해줘도 될까?"
"그럼 나야 고맙지"
글로리아는 눈을 지그시 감고 나에게 몸을 맡겼다. 어릴 적 부모님 어깨를 주물렀던 실력을 발휘하여 양손으로 그녀의 뭉친 어깨를 풀어주었다. 단단히 뭉친 근육은 두 손이 아닌 팔꿈치로 꾹꾹 눌러주기도 하고, 두 손을 합장하고 어깨를 톡톡 두드리기도 했다.
팔꿈치로 마사지를 하는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글로리아와 내 주변을 빙그르르 둘러싸기 시작했다. 멀리서 글을 쓰던 피터도, 체스를 두던 기아저씨도, 노래를 듣던 간호사 개리까지. 모두가 이상한 마사지를 받는 글로리아의 반응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탄식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FANTASTIC"
그녀의 반응을 지켜본 사람들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고 글로리아가 앉았던 의자 옆으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기아저씨, 아일랜드 저널리스트 피터, 북아일랜드 출신 간호사 개리 그리고 발등에 파스를 붙이고 사색을 즐기고 있던 장까를로도 줄을 섰다. 허준이 많은 환자들을 봤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줄을 서시오! 5분에 1유로, 10분에 2유로" 나는 이렇게 외치며 사람들에게 너스레를 떨며 농담하는 여유도 생겼다. 다섯 명의 순례자들에게는 내 야매 재능 기부를 했다. 자기차례를 기다리면서도 마사지 받고 있는 사람의 반응을 살피고 웃고 떠들었다. 마사지를 받은 사람들 모두 꽤 만족한 눈치였다.
마지막 마사지를 받은 사람은 북아일랜드 출신 개리였다. 개리는 시니컬하면서도 호기심이 상당히 많은 친구였다. 어깨 마사지를 하기전에 장까를로처럼 발이 시큰거린다고 해서 물파스를 발목에 먼저 발라주었다. 물파스 특유의 쿨링감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성분을 물어보기도 했다. 파스를 발라주고 어깨 마사지를 해주었다. 마사지를 다 마치고 파스를 챙겨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개리가 나에게 물었다.
"아란, 너는 어때? 발에 물집은 없어?"
"몇 개 있을걸? 2개인가? 3개인가? 이따 발 씻고 터트리면서 세어보고 알려줄게" 나의 농담섞인 대답이 개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너 상태도 모르고 왜 다른 사람들 발만 살피고 다니는 거야?"
"난 괜찮아. 이따 물집 바늘로 터트리고 바셀린 바르고 양말 신고 자면 돼."
"스스로부터 살펴야 되는 거 아니야? 왜 너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걱정하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부족하겠지만 나의 소소한 행동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들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나의 큰 행복이거든. 내 발바닥에 잡힌 물집은 금방 괜찮아 거야.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진심이었다. 감사하게도 많은 순례자분들은 아주 작은 나의 말과 행동에도 관심을 기울여주셨다. 야매 마사지를 할 때도, 유럽에 없는 파스를 붙여줄 때도, 말도 안 되는 스페인어로 오지랖을 부리며 인사를 할 때마저도 미소로 화답해 주셨다. 길고 긴 힘든 여정일지도 모르는 산티아고 도보순례. 나로 인하여 그들이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행복이고 큰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