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극곰 Aug 15. 2024

I'm 낫 OK

괜찮지 않아도 괜찮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발을 바닥에 딛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전날 발바닥에 잡힌 물집을 터트리고, 바셀린을 바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종아리와 발등 붓기까지 생각은 하지 못했나 보다.


  발등은 무령왕릉처럼 볼록하게 솟아올랐고 종아리는 코끼리처럼 딴딴하고 무거워 한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평소 같았으면 "부에노스띠아스" 하며 순례자분들에게 문안 인사를 했을 텐데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발등과 종아리에 파스를 붙이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걸까? 장까를로와 기아 저 씨가 먼저 아침인사를 건넸다.  


"아란, 부에노스띠아스. 발 괜찮아? 물집은? 아침은 먹었어?" 나를 흉내 내는 장까를로의 모습에 옅은 미소로 그에게 내 발등을 가리키며 너스레 떨었다.    

 

"장까를로, 좋은 아침이에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굿모닝이 아니에요. 발등이 많이 부었거든요. 원래 일어나고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는데 오늘은 적응하는데 시간이 꽤 걸리네요. 세수하러 가다가 그만 넘어졌지 뭐예요. 아저씨가 그걸 봤으면 또 놀렸을 텐데.. 아쉬운 구경거리 놓치셨어요."


 장까를로는 뭐라고 말하려다 로쵸 아저씨가 불러 급히 자리를 떴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기아저씨는 마리아주머니를 다급하게 부르셨다.


"마히 ~ 마히!!"


 '늘 다정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침착한 기아저씨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다니..' 새로운 기아저씨 모습에 살짝 놀랐지만 이것 역시 산티아고가 주는 선물 같아 오히려 좋았다.


"Oui" 마리 아주머니는 짧게 대답한 후 가방에서 작은 주머니를 아저씨에게 건넸고 아저씨는 무릎을 꿇고 나의 발을 이리저리 살펴보셨다.


"아한, 붕대로 발등을 감으면 나아질 거야."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압박붕대를 꺼냈고 내 발에 눈을 고정한 채 붕대로 양쪽 발등을 감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다 됐다."

"감사합니다."


 붕대로 고정시킨 발 위에 양말을 신으니 확실히 한결 편해졌다. 그의 진심 어린 보살핌에 황송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덕분에 다시 무릎에 힘을 넣고 운동화 끈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절뚝이며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모습이 꼭 바지에 오줌 싼 사람 우스꽝스럽고 어기적 걷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내 걸음을 보면서 웃는 건 나밖에 없었다.


 기아저씨와 마리아주머니는 앞서 걷고 계셨는데 내심 걱정스러우셨는지 한 번씩 뒤를 돌아보셨다. 그러다 이내 걸음을 멈추셨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계셨다.


"아저씨 어디 불편하세요?"


"아한, 이거 받아." 하면서 등산 스틱을 주셨다. 며칠 전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개암나무 지팡이를 잃어버려 다른 지팡이가 필요하긴 했지만 이미 큰 폐를 끼친 기아저씨에게 또 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아요. 덕분에 이제 이제 걸을 수 있는걸요. 아저씨는 저의 나이팅게일이에요." 기아저씨는 큰 소리로 웃으며 기어코 손에 등산스틱을 쥐어주셨다.  


"아한, 스틱이 있으면 훨씬 도움이 될 거야. 아비앙또(이따 또 만나)."


 그렇게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다른 순례자들의 뒤를 따라 힘차게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가셨다. 스틱으로 내 몸을 지탱하기는 했지만 다른 순례자들의 속도에 맞추는 건 무리였다. 나를 잠시 스쳐 지나간 순례자들이 점점 멀어지더니 신기루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신기루가 사라진 자리에는 강렬한 스페인의 햇빛이 대신하고 있었다. 얼굴에 땀이 주륵주륵 흐르고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해서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카페에 들렀다. 카페에는 이미 장까를로, 글로리아, 로쵸, 마리, 기, 선생님, 자우마 3인방 10명이 넘는 순례자분들이 콜라와 맥주를 마시며 쉬고 있었다. 오늘의 순례 코스를 브리핑하던 호세는 절뚝거리며 들어오는 나를 보고 브리핑을 잠시 멈추었다.  


"아란, 걸을 수 있어?"

"No problema! Pero Poco a Poco.(문제없죠. 그런데 천천히 걸어야 할 것 같아요.)"

 

 그의 질문에 나는 스페인어로 대답하고 시원한 맥주를 주문했다. 맥주를 받고 다시 자리에 앉았는데 장까를로가 약을 하나 주었다.


"이게 뭐예요?"

"소염진통제야. 너무 힘들면 밥 먹고 먹어."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가방을 챙겨 홀연히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말을 건넬 때마다 웃으며 괜찮다고 "Hasta Pronto(곧 만나요)" 말했다. 그들이 다 떠나고 파라솔 의자에 혼자 남아 쓸쓸히 맥주 한 잔을 다 비우고 길을 나서기로 했다. 가까스로 기아저씨가 준 스틱을 지탱하며 일어났다.


  오후가 되어 알베르게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는데 누군가 나의 몸을 흔들며 깨우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아란! 아란!"

"선생님! 무슨 일세요?"

"아란, 많이 피곤했나 봐. 곧 저녁 먹을 시간이야. 호세가 스페인식으로 저녁을 차려준대. 저녁 먹고 다시 자자."


 잠귀도 밝고 예민한 편이라 평소에도 깊은 잠을 못 자는 편이라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단 한 번도 시에스타를 즐긴 적이 없다. 그런데 코까지 골면서 잠이 들었다니 하루가 고단하기는 했나 보다.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침대 머리맡에 하늘색 봉지가 놓여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 고단한 하루를 보냈을 나를 위해 기아저씨가 과자와 오렌지주스를 사 왔지만 곤히 자고 있는 나를 깨우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시다가 머리맡에 걸어두셨다고 했다. 아빠처럼 날 옆에서 챙겨준 기아저씨 덕분에 고단한 하루가 행복한 하루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마리 아주머니와 기아저씨


한국인선생님과
오늘의 태양 떠오르다
퉁퉁 부운 발과 종아리
스페인요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