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자정리, 거자필반'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이지만 가끔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서라도 이별을 멈추고 싶은 순간이 있다. 선생님과 이별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선생님은 개학 일정에 맞춰 사리온행 버스를 타셔야만 했다. 부르고스에서 호세와 사라와의 이별처럼, 이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이 그저 지속되기만을 바랐다.
선생님과 함께 걷는 마지막 날, 언제나처럼 선생님은 앞서 걸어가고, 나는 뒤에 절뚝이며 따라갔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은 잠시 낮잠을 주무셨고, 나는 마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성당으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성당의 웅장함에 감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성모상 아래 무릎을 꿇고 선생님의 남은 여정이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기도드렸다.
짧은 기도를 드리고 성당에서 나와 옆에 있는 작은 슈퍼에 들러 물과 간식을 사들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슬플 때 춤을 추는 굼벵이처럼 침낭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움츠리고 지퍼를 머리끝까지 올렸다. 일기장 사이에 끼워둔 부르고스에서 산 엽서를 꺼내어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꾹꾹 마음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쓰는데 '뚝. 뚝. 뚝.' 갑자기 눈앞이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성격이 급해 이별을 미리 준비했지만, 이별이라는 건 어쩌면 미리 준비한다고 덜 슬픈 건 아닌가 보다.
다음날, 누군가 또 떠나간다. 그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라는 사실에 세상이 무너질듯한 슬픔이 밀려왔다. 입맛은 없었지만 마지막 식사라는 생각에 카페콘레체와 레몬맛 머핀을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짐을 챙기고 배낭을 메고 알베르게를 나서기 전, 선생님은 함께 걸었던 순례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 내 차례는 오지 않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멈추지 않았다. 결국, 내 차례가 다가왔고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하얀 봉투에 전날 슈퍼에서 산 물과 간식거리 그리고 마음을 담은 편지를 담아 건네드렸다.
"선생님 제가 드릴 건 이거뿐이라서 정말 죄송해요. 제가 돈을 벌면......"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고 바닥에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간신히 눈물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부족한 저와 함께 걸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따뜻한 미소로 말씀하셨다.
"아란, 함께 걸어줘서 고마워. 너는 밝은 에너지를 품고 있어. 스스로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밝은 빛 같은 거. 너의 순수한 미소와 긍정적인 기운 덕분에 즐겁게 걸을 수 있었어. 내 인생의 한 챕터를 아름답게 채워줘서 고마워."
마을을 울리는 교회 종소리보다 더 깊고 요란하게 마음을 울리는 말이었다. 선생님 없는 내 카미노는 어떨까? 선생님 없이도 잘할 수 있을까?
다른 순례자들은 선생님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먼저 길을 떠났다. 나도 앞으로 가야 했지만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선생님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셨지만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만남에 익숙하고 헤어짐에 능숙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눈물을 삼키려 애썼지만 눈앞에 눈물이 가물거려 길이 구불구불 흔들리는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걷고 있을 때 옆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돌려보니 짧은 금발의 순례자가 애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어눌한 한국어로 물었다.
"괜찮아?"
스페인 시골길을 걷다 들려온 익숙한 한국말은 울던 아이도 뚝 그치게 만드는 마법의 곶감처럼 눈물이 멈추게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 어눌한 한국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2년간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스코틀랜드 출신 카틀린이었다. 아무 대답 없이 멈춰 선 나를 향해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번 더 물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괜찮다고 말하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지나갈 것 같고,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버거운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속이며 애써 미소 짓고 대답한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지나갈 거야." 그녀는 내 웃음 뒤 슬픔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고 포근하게 안아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부엔까미노"
그녀는 짧게 인사를 건네고 터벅터벅 천천히 자신의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모두들 저마다의 카미노를 향해 앞으로 묵묵히 나아가는데 나만 홀로 후회와 연민 속에 뒤를 돌아보는 것 같다. 앞으로 나아갈 힘도 없고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자신의 길을 향에 걷는 낯선 이들의 뒷모습이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고한걸음 앞으로 전진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