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극곰 Sep 05. 2024

쨍그랑

홀로서기가 필요해

  이상하리만큼 컨디션이 좋다. 볼록하게 올라온 붓기는 여전했지만 진통제와 소염제 가 제 역할을 하고, 히라다상이 선물해 준 동전 파스도 한몫한 모양이다. 오늘따라 어쩐 일인지 발을 땅에 디딜 때 무릎까지 찌릿찌릿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꼬까신을 신은 듯 사뿐한 발걸음으로 다른 순례자분들과 발맞추어 걷는다.

 

  태양은 정수리에 강하게 내리쬐고 땀구멍이 열려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각, 새벽 일찍 서두른 탓에 마을 어귀에 다다랐고 알베르게까지는 10km 정도가 남은 상황이었는데 로쵸 아저씨가 나의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하셨다. 1km를 지날 때마다 카운트다운을 하시며 남은 거리를 알려주신다. 연두색이 초록색이 될 정도로 땀에 흥건하게 젖은 티셔츠를 보니 나는 핑계고 아저씨 스스로에게 힘을 북돋아주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잠시 멈추어 손수건으로 땀한번 닦으시고, 굽어 있던 허리를 한번 쭉 피고 안경을 올려쓰신다. 힘이 부치셨는지 숫자가 작아질수록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아란, 10km 남았어. 9km 남았어. 8km... 7km..."  


 새해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은 사람들을 환희로 물들게 하지만 아저씨의 숫자 세는 소리를 때마다 내 몸에 나사가 하나씩 풀리면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분명 앞으로 걸어가고 있지만 러닝머신 위에서 제자리 걸음 하는 기분.


 5km 정도 남았을 때쯤 살짝 아저씨에게서 벗어나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혼자 짧은 상념에 빠져 걷기로 한다.  '산티아고는 걷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인데 왜 숫자를 계속해서 세는 걸까? 그것도 내 핑계를 대고..' 찰나의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 쨍그랑 울리며 살짝 금이 가는 걸 느낀다.


 

 가장 듣기 힘든 카운트다운을 들으며 중세시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쾅' 크레덴시알에 도장을 받고 방으로 안내 받는다. 20개가 넘는 도장이 빼곡하게 나의 흔적을 고스란히 말해준다. 안내받은 방에는 4개의 싱글침대가 놓여있었는데 '우와~'라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침대가 폭신하고 편안해 보였고 방마다 화장실과 욕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그동안 머물렀던 숙소가 주마등처럼 짧은 무성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머물렀던 대부분의 알베르게는 커다란 공간에 이층침대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적게는 10명, 많게는 100명이 넘는 순례자들과 한 곳에서 생활했다. 가끔 운이 나쁜 경우,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찬물로 샤워를 해야하는 알베르게도 있었다. 나는 장까를로에게 묻는다.


"장까를로, 어떻게 이렇게 좋은 알베르게를 찾았어요?"


"글로리아가 예약했어."


 장까를로는 알베르게 시설에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턱 끝으로 글로리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글로리아는 함께 걷는 순례자들을 위하여 전날 미리 알베르게를 예약을 했다.  


"고마워요 글로리아." 함께 걷던 순례자들과 나는 글로리아에게 고마움을 표했고 글로리아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우리는 여기를 통으로 빌린거나 다름없어. 그동안 편하게 잠도 잘 못잤을텐데 오늘만큼은 우리 여기서 편하게 쉬자."


 글로리아가 우리에게 웃으면서 말하고 있을 때, 알베르게 문이 빼꼼 열리면서 한 순례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밥말리를 연상시키는 레게 머리에 나무로 된 지팡이를 짚고 검정 선글라스를 쓴 순례자였다. 한눈에 봐도 강렬한 스페인 날씨에 지친 표정이었고 금방이라도 주저 앉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알베르게 관리하는 오스피딸레로가 나오더니 그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말한다.


"Completo(꼼플레또), 자리 없어요. "  


 지칠 대로 지친 그의 표정을 보는데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고 얼굴이 이내 뜨거워진다. 미리 예약한 덕분에 편안한 곳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만 그렇지 않은 순례자들은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 머무르거나, 만약 그마저도 찾지 못하면 몇 킬로를 더 걸어 다른 마을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라 마음이 불편했다. 만약, 알베르게가 만실이면 다른 알베르게를 찾거나 다음 마을로 가는 것은 산티아고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지만 '알베르게예약' 은 살짝 비겁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밥말리 순례자의 지친얼굴을 보니 죄책감까지 느껴졌다.  


 인생은 예약이 없는데, 인생의 축소판인 산티아고에서 '알베르게 예약' 이라니 순리에 벗어나는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다. 글로리아의 배려는 정말 감사하지만 내 안에서 무언가 또 한 번 쨍그랑하며 금이 더욱 짙어지고 와장창 무너졌다.


홀로서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콩고소년 존, 알베르게


이전 02화 선생님, 나의 선생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