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니 두 사람은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웃고 있었지만 하늘색 눈동자에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내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버스를 타기 전 크리스티앙은 작은 봉지를 손목에 걸어주었다. 봉지 안에는 샌드위치, 맥주, 초코바, 염주 그리고 작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쪽지를 읽고 나는 또 한 번 눈물을 훔쳐야만 했다.
'아란, 아이 미스 유. 산티아고에서 만나.'
짧은 쪽지에서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두 사람과 나눴던 실없는 농담과 웃음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떠올라 마음이 한구석이 저릿했다. 우리의 짧은 만남처럼 창문 밖 풍경은 빠르게 흘러 버스는 20분만에 멜리데에 도착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거쳐가는 이 작은 마을은 아름다운 교회와 건축물들로 유명했지만 무엇보다도 '뿔뽀'라고 불리는 문어요리가 일품인 미식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멜리데, 꼬레안 치카 멜리데"
버스가 멜리데에 도착하자 기사님께서 친절히 알려주셨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배낭을 메고 버스에서 내렸다. 내리는 순간 기사님과 몇몇 승객들이 나의 등에 대고 소리치듯 말했다. "부엔 카미노." 그들의 따뜻한 인사가 크리스티앙과 키캐가 없는 새로운 여정을 축복해 주는 것만 같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스페인의 하늘 아래 태양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거리를 가득 채웠고 커다란 가방을 메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순례자들을 따라 멜리데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빨래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아 크리스티앙이 준 봉지를 열었다. 그가 선물해 준 염주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염주를 손에 쥐고산티아고에 처음 온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3일 밖에 남지 않은 여정. 인생이 변하고 있는 걸까? 길이 끝나면 인생이 바뀔 수 있는 걸까?' 손끝으로 염주알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그동안의산티아고를 천천히 되뇌어 보았다.
산티아고를 시작했던 날, 함께 걸었던 순례자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한국인 선생님, 장까를로, 기, 마리, 글로리아, 로쵸 그리고 크리스티앙과 키캐까지. 그들과 나누었던 모든 순간들이 이제는 추억의 조각이 되었고 손끝으로 염주알을 돌릴 때마다 소중한 순간이 떠올랐다. 함께 걸었던 발걸음은 선명한 발자국이 되어, 내 인생의 일부로 깊숙이 자리 잡은 느낌이었다.
산티아고는 내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통하여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겼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면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소통의 진정성도 배우게 되었다. 때로는 눈빛 하나로, 짧은 대화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함께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응원했다.
또한,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를때마다 그것은 마치 인생의 고통을 비추는 거울과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불필요한 물건으로 배낭이 점점 무겁게 느껴질 때마다 버리지 못한 욕심과 부정적인 감정들이 인생을 짓누르고 삶이 더욱 고통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배낭 속에 불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버리면 걷는 것이 수월해지듯이, 삶에서 붙잡고 있는 쓸데없는 감정과 욕심도 하나하나 내려놓으면서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도.
손끝으로 백팔 개의 염주알을 굴리고 또 굴렸다. 순례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깨달았다. 이 길이 내게 가르쳐 준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의 소중함'이라는 것을.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소통하며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기루를 기다리며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충실하여 오늘의 행복을 온전히 만끽하자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산티아고까지 3일 남은 시점, 아직까지는 파울로코엘료처럼 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함께했던 순례자들 덕분에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힘을 빼고 삶을 사는 법을 배웠다.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느낌이었다. 3일밖에 남지 않은 이 여정이 벌써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앙 향수냄새가 은은하게 배어있는 염주를 손에 꼭 쥔 채 가슴에 얹고 잠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