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산티아고 그 후

by 북극곰

교회 종소리나 닭울음소리에 깨어날 필요도 없고

이른 아침에 헤드랜턴을 켜고 어둠 속을 걸어 나설 일도 없다.

이제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하루에 20~30km씩 걷지 않아도 된다.

조가비나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지 않아도 되고, 나를 힘들게 했던 오르막길과 갈리시아의 지독한 소똥냄새도 안녕이다.


끝없이 펼쳐진 그늘 한점 없던 메세타 평원의 황금빛 밀밭과 나바라 지방의 싱그러운 포도밭,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해바라기밭도 안녕이다.

내리쬐는 강렬한 스페인 햇볕에 "모래노"(구릿빛) 피부가 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자갈밭을 걸으며 발을 지압하지 않아도 된다.


화장실이 급해 Bar를 찾아 빨리 걷지 않아도 되고, 며칠 묵혀둔 바게트로 끼니를 때우지 않아도 된다. 샤워 순서를 기다리거나 비누로 머리를 감아야 하는 일도, 손빨래를 해야 하는 일도 더는 없다. 손빨래는 이제 그만.


매일 밤 다른 천장을 보며 침낭 속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혹시 모를 베드벅을 걱정하며 잠들 필요도 없다. 알베르게에서 사람들 코 고는 소리를 듣거나, 무거운 몸을 낑낑거리며 2층 침대로 올라갈 필요도 없다.


잠들기 전, 다리에 안티푸라민을 바르거나 마사지할 필요도 없고.

물집 걱정에 발바닥에 더 이상 바셀린을 바를 필요가 없다.

저녁에 빨고 아침에 입는 단벌신사가 될 필요도 없고, 새벽이슬에 젖은 축축한 옷을 입고 어기적 걷는 일도 이제는 모두 추억이 되겠지.


그런데 참 이상하다. 다시 걷고 싶은 걸 보면..

약 800km가 넘는 그 길에서 많은 것을 보았기에.. 많은 것을 받고 배우며 내 안에 얼마나 큰 사랑이 깃들어 있는지 느꼈기에 그 길은 행복 그 자체였다.


작은 것 하나에 감동하고 감사할 줄 아는 내가 되었고, 하늘 한 점 볼 여유조차 없었던 내가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30일 동안 길 위에서 정말 많이 웃었고, 이별이 슬퍼 울기도 했지만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말했다. 이 길을 정말 즐기고 있다고. 내 얼굴에서 행복이 느껴진다고. 어느 날 한 브라질 순례자는 "모두가 너를 좋아하고 사랑한단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나에게 크나큰 기쁨이 되었다.

'사서 고생'이라거나 '미친 짓'이라고 말하는 그 길. 외롭다고 하는 그 길에서 나는 국적이 다른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 그들에게 받은 사랑 덕분에 나는 너무나도 행복하게 걸을 수 있었다.



왜 걷냐고 묻는 사람들.

힘들고, 위험하고 고생이라고만 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 길을 걷지 않고는 모른다. 처음에는 산티아고가 목적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걷는 것 자체가 의미가 된다는 것을.


걷는 이유는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리고 산티아고 도착했을 때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고생도 많았지만, 그 고통마저도 잊게 만드는 사랑을 배울 수 있었다.

사랑뿐만 아니라 자연을 통해 여유를 배우고, 마음을 비우며 그 빈자리에 사랑을 채우는 법을 알게 되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애써 찾는다고 찾아지는 게 아니다.

자연에 감사할 줄 알게 되고,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


산티아고를 걷고 내 인생은 드라마틱하게 바뀌지 않았지만 후회는 없다.

인생 최고의 경험을 길 위에서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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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것(해드랜턴,염주,약,물통,김,삼양라면-스페인아저씨가_줬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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