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할머니가 생기다
나는 어렸을 때 이름이 두 개였다. 아빠가 지어주신 '아란'과, 할머니가 지어주신 '서운이'. 하지만 할머니는 아빠가 지어주신 이름을 한사코 거부하시고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서운'이라고 부르셨다. 얼핏 세대를 앞서간 세련된 이름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이름에는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 1980년대는 남아선호사상이 깊게 뿌리내린 시기였다. 전라도 땅끝마을 출신 할머니 역시 그 시대의 사고방식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나를 뱃속에 품은 엄마의 배가 옆으로 퍼지고 다른 산모보다 유난히 커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할머니는 내가 아들이라고 확신하셨다. 가끔 지인들이 태어날 나를 위해 분홍색 옷이나 신발을 선물해 오면, 태어나지도 않은 나의 고추가 떨어질까 걱정하며 당장 바꿔오라고 불호령을 내리기도 하셨다.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을 보내고 세상에 처음 나와 힘차게 '응애응애' 팡파레를 울리며 셀프 생일 축하를 했다. 모두가 나의 탄생을 축복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할머니는 나를 요리보고 조리 보시더니 '있어야 할 것이 없다' 며 혼자만의 요지경 세상에 빠지셨다.
배 모양만 보고 아들인지, 딸인지 성별을 맞출 수 있따고 자신했던 예측이 틀린 것은 할머니께 큰 충격이었다. 나는 아들이 아닌 그저 4.3킬로의 우량한 딸이었다. 할머니는 본인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보다 내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상실감을 느꼈다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 서운하다' 며 나를 서운이로 부르셨다.
지금은 역변 했지만 어렸을 때는 눈도 크고 잘 웃는 순한 아이여서 누구나 나를 예뻐해주셨다. 시장에서 처음보는 아주머니도, 교회 집사님도 엄마 등에 찰싹 붙어있는 포대기 속에서 옴지락거리던 날 보고 귀여워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한 번도 예뻐해 주지 않으신 분이 계셨다. 바로 할머니. 할머니는 나를 한 번도 안아주지 않으셨다. 앨범 속 몇장 없는 할머니와 찍은 사진을 보면 나는 할머니 옆에서 늘 울고 있었다.
할머니와의 좋은 기억 하나도 없어서였을까? 할머니 손에 자라거나,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부럽다'는 마음보다 '신기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꼬부랑 허리를 하고 엄마를 다그치거나 나에게 담뱃불 심부름을 시키는 모습이 전부였으니까.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가 끝나 집에 오면 가방을 내려놓기 전에 할머니는 나를 부셨다.
"서운아, 여기 담뱃불좀 부쳐온나."
할머니는 입고 계시던 고쟁이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셨다. 고사리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들고 주방으로 가 목욕탕 플라스틱 의자 위로 올라가 가스불을 켜고 담배에 불을 붙여 갖다 드렸다. 하지만 할머니께 가는 길에 담뱃불은 금방 꺼지기 일쑤였다. 결국 할머니가 꼬부랑 허리를 붙잡고 직접 주방으로 오셔야 했다. 그런 번거로움을 겪으면서도 왜 담뱃불 심부름을 내게 시키셨는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초등학생때는 담배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몰랐고 할머니가 시키신 거니까 다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거라도 해야 친척오빠나 친척동생처럼 나를 예뻐해주실거라 어린마음에 발버둥쳤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서운이' 라는 이름 대신 진짜 내 이름을 불러주시길 바랐던 걸까?
시간이 흘러,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계셨다. 그때까지 엄마는 할머니의 병수발로 많은 고생을 하셨꼬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며 할머니에 대한 동정보다 미움이 더 커져만 갔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나고 교실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할머니의 부고를 전해주셨다. 아빠의 어머니인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나를 한번도 안아주지 않았던 사람. 엄마를 힘들게 한 사람, 내 동생을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든사람. 나에게는 미움만이 가득했다.
시간은 흘러, 10년 전 발렌시아에 갔을 때 키캐의 가족을 만났다. 키캐네 부모님이 운영하는 빵집에 들러 키캐 부모과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 인사를 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키캐의 할머니는 내가 추울까봐 꼬옥 안아주셨다.
"꼬레아 야야?" 키캐의 할머니는 할머니가 계신지 물어보셨고 나는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돌아가셨다고 했다.
할머니는 키캐에게 통역을 부탁하시면서 스페인어로 말 하셨고 키캐는 웃으면서 나에게 통역을 해주었다.
"아란, 우리 할머니가 오늘부터 너의 할머니라고 하시는데? 너는 스페인 할머니가 생겼어. "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고 할머니와 키캐를 한번씩 번갈아 쳐다보았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는데 나를 쳐다보시고 본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Tu yaya (너의 할머니)"
다시 한번 'yaya'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한 번 꼭 안아주셨다. 이 때 나는 할머니의 사랑이 아랫목보다 따뜻하다는 걸 처음 느꼈다.
마지막으로 발렌시아에 갔을 때, 스페인 할머니의 생신이었다. 없는 솜씨였지만 할머니를 위하여 왁스실로 팔찌를 만들었고 라이터가 없어 마무리 매듭만 남겨두고 있는 상태였다. 이왕 만든 거 꼭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커 휴대폰 어플을 켜서 할머니께 보여드렸다.
'나는 라이터가 필요합니다.'
홀로 지내시는 할머니께서는 무릎이 안 좋으셔서 주로 앉아계셨다. 그런데 손녀가 라이터가 필요하다는 말에 보행기를 밀며 부엌으로 한발 한발 앞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그리고 가스레인지 불을 붙여 주시며 내가 가져온 팔찌를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다.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께서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한국 손녀를 위하여 가스 불을 켜주시는 모습에 울컥했다. 그 순간, 어렸을 적 담뱃불 심부름을 시켰던 친할머니가 떠올랐고 조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란 키캐가 문득 부러웠다.
왜 나의 친할머니는 나를 한 번도 예뻐해 주시지 않았을까.
왜 할머니가 내게 남겨주신 것은 사랑이 아닌 듣기만해도 서운해지는 '서운이' 라는 이름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