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Decision is A Decision.
Coin-Toss (3/4) - Feat. 트루먼 & 트럼프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
1944년 루즈벨트 대통령 4선 도전 당시 러닝메이트로 지명, 부통령에 선출됩니다.
그런데 1945년 4월 12일,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루즈벨트 대통령이 서거합니다. 이에 부통령이 된 지 82일 만에 대통령직 승계하며 임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대통령 재임 기간 및 전ㆍ후 모두 인기가 높지 않았습니다.
전임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Franklin D. Roosevelt)
대공황 시기 뉴딜(the New Deal) 정책으로 대표되는,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4선 대통령입니다.
후임 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주도 및 연합국 총사령관,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 지낸 전쟁영웅입니다.
트루먼은 전ㆍ후임 대통령이 받는 국민의 존경ㆍ사랑에 가려, 평범한 또는 비판 많은 대통령 이미지가 컸습니다. 본래 미주리(Missouri) 시골 농촌 출신에, 고등학교 졸업 학력의 평범한 아웃사이더 정치인이었습니다. 1944년 대선 앞두고는, 부통령 후보자로서 가능성이 가장 낮다고도 평가되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4선 도전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44년 대선에서는, 대통령 유고 시에 뒤를 잇는 부통령 후보가 무척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전임 부통령 ‘헨리 월리스 (Henry A. Wallace)’와 루즈벨트 관계가 안 좋아집니다. '해리 트루먼'은 부통령 후보들 가운데 유일한 ‘뉴딜 정책’ 지지자였습니다. 민주당 중진들 내에서도, 루즈벨트 사후에 ‘트루먼이 컨트롤하기에 상대적으로 가장 만만한 후보다’는 의견들이 언급됩니다.
트루먼은 당초 예상과 달리 ‘후임자 부통령’이 됩니다.
맨해튼 프로젝트 (the Manhattan Project)
2차 세계 대전 후반,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 암호명입니다. 트루먼은 대통령이 되고서야 관련 보고를 처음 받습니다. 즉 부통령도 모르던 '극비 프로젝트'였던 것입니다.
부통령으로 재임한 얼마간, 트루먼은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대면이 거의 없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나 미국의 '대 소련 정세 악화' 등을 전달ㆍ보고 받지 못했습니다.
1945년 4월 12일, 급작스레 대통령에 취임한 트루먼.
하루아침에 수많은 난제와 의사결정의 부담ㆍ책임에 직면합니다.
당시의 기분을, 트루먼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I felt like the moon, the stars, and all the planets had fallen on me."
"하늘 위의 달과 별, 모든 행성들이 내게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검증되지 않은 '대통령으로서의 리더십'
의구심까지 받는 상황에서, 트루먼은 눈앞에 놓인 긴박ㆍ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하기 시작합니다.
"The Buck Stops Here."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그의 좌우명, 집무실 책상 위 '명패'에도 적힌 문구입니다.
< 출처: www.trumanlibrary.gov >
회의 및 연설 시에도 자주 활용합니다.
The final decision comes to the President.
I used to have a sign on my desk that said,
‘The Buck Stops Here.’
The buck stops at the president's desk.
‘굳건한 책임감’ ‘단호한 결단력’으로
트루먼은 대통령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차대한 결정들을 내렸습니다.
1945년 '원자폭탄 투하(Atomic Bombings)' 결정
일본 항복, 2차 세계대전 종식
1947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 선언
공산주의 확대 봉쇄, 반소ㆍ반공의 경제/군사 지원
1948년 '마셜 플랜(Marshall Plan)' 공식 발효
서유럽 원조 통한 공산화 방지, 자유주의 세계 수호
1949년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 창설
서유럽 집단방위, 공산 세력 대항 군사 균형 유지
1950년 한국전쟁 미군 파병 결정
발발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참전 진행
1952년 한국 전쟁 당시, '20% 중반' 최저 지지율.
2008년 조지 부시 대통령의 '20% 초반' 등장 전까지 55년 넘게 이어지던 기록입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종반ㆍ냉전기 격변의 역사에서,
냉철한 판단력과 책임감 있는 단호한 결정력을 보여줍니다. 자본주의ㆍ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며, 미국 및 세계사에 커다란 업적을 이루었다고 인정받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역사적 평가를 받는 대통령으로 손꼽힙니다.
실제로 미국 역대 대통령 평가 시,
언제나 10위권 안에 있으며 최근 몇 차례 결과에서는 6위에 오릅니다.
해외 업무를 하다 보면, 국가별 특징이 느껴집니다.
'주관적'이든, '비교적 객관적'이든.
뉴스ㆍ정보ㆍ지식 등을 통해,
우리는 여러 국가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습니다.
각자 직/간접 경험 정도에 따라,
해당 국가ㆍ사람에 대한 특정 이미지의 온도 차이도 생깁니다.
특히나 내/외국인 상관없이 글로벌 비즈니스맨들과 얘기하다 보면, 일부 국가에 대해서는 부정적 이미지를 넘어서 적개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일정 수준의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한대 치고 싶다!’에서부터 '살인충동(?) 느낀다!'는 분들도 꽤 됩니다.
(JFK 역시 충분히, 아주 충분히 공감되고 이해됩니다~)
“이게 어떻게 내 책임이야!!” 라고 소리치고 (싶고)
분노가 극에 달하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결국 본인 책임' 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본인 책임 되어야' 합니다.
두 가지 - 흥미로운 사실 & 신기한 사실
흥미로운 사실은,
‘내 책임 아니야!’ 생각하는 순간...
어떤 결정ㆍ사안 관련 문제 발생 시,
해결책보다는 ‘비난 대상’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이윽고 ‘핑곗거리’가 떠오릅니다.
‘변명’의 인과관계 논리가 맞추어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될 뿐입니다.
< 출처: https://www.cagle.com/ingrid-rice >
반면에 신기한 사실은,
‘내 책임이야!’ ‘내 탓이오!’ 마음먹는 순간...
(물론 인정하기 싫고, 정말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며...)
(고통스럽거나 억울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겠지만...)
비난의 대상이나 핑계가 떠오르기보다는,
‘해결책’ ‘최선책’ ‘차선책’ 찾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Take Ownership of My Coin.
The Buck Stops Here.
So How~?? So What~??
‘역시나 이래나 저래나 내 탓이오~’로 생각하기,
보다 명확히는 '책임을 결심' 해야 합니다.
아... 참... '수양(修養)*' 및 '내공(內攻) 쌓기' 과정입니다!
* 몸ㆍ마음을 갈고닦아 품성ㆍ도덕ㆍ지혜,
그리고 지식ㆍ역량 따위를 높은 경지로 끌어올림
상기의 두 가지 (흥미ㆍ신기) 사실에 덧붙여,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채,
뭔가에 의해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어) 휩쓸려 가면...
결과에 대해 '내 책임 아니다' 라고 여기게 되고,
자연스레 비난ㆍ핑계ㆍ변명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러나 No Decision 또한
스스로 선택한 또 하나의 A Decision입니다.
그럼에도 결정해놓고 나서 책임 회피하는 것,
이것이 가장 최악입니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동전을 던진다!?)
물론 No Decision임에도 사안이 잘 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뭔가 그럭저럭 괜찮게 나아가는 경우,
이를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습니다.
이 또한 문제일 수 있고, 결국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비즈니스와 삶에서 차후에 더 큰 일들이 다가오고 놓일 때,
쌓인 게 없어 내공(內攻) 어린 대처가 안될 테니까요.
"No Decision is A Decision~!!"
*** Coin-Toss, 다음 편(4/4)에 계속됩니다.